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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 기록

이것은 마지막 편지이지만 결별의 편지는 아니야

피에르 베르제,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by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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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 피에르 베르제, 프란츠(Franz)



2009년 3월 2일


헤이, 네가 너무도 보고 싶어.



누군가 사랑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이 책을 건네고 싶다. 죽은 연인에게 보내는 사랑과 애도가 담겨 있는 베르제의 편지를. 짧아서 금방 읽을 수 있는 분량이었지만, 도저히 한 텀에 읽을 수 없어서 매일 밤 조금씩 나눠 읽었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일주일 동안은 참을 수 없는 슬픔과 침잠된 기분으로 밤을 보내야 했지만….(직장인에게 저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면 이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으리라) 읽는 내내 "영원"(101면)의 사랑이 있다면 이런 형태가 아닐까 생각했다. 베르제는 이브가 부르면 늘 달려갔던, 이브 눈을 감겨주었던, 그 모든 결함과 사건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너 역시 사랑했어."(84면)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베르제의 마음을 어떻게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 또 이브가 베르제에게 보냈던 "맹목적인 믿음"(96면)은? 추도문으로 시작하여 추도문으로 끝나는 이 책은 사랑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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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살아 있게 했던 것,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달려온 불안에서 당신을 구해준 것 역시 다름 아닌 당신의 작품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예술가는 오로지 창작을 통해서만 구원과 희망의 이유를 발견합니다. (p. 14)


아주 오래전, 그가 너를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릴 거라며 내가 날을 세웠던 건 사실이지만, 모두 네가 원한 것이었음을 이제는 알아.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 어느 날 문득, 네 내면의 가장 지독한 욕망은 자기 파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 내가 너와 너무나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말하듯이 완벽한 평행을 이루고 있었기에 너를 구하는 데 실패한 거야. (p. 50)


하지만 슬픔과 동시에 안온함도 느껴졌지. 죽음이 너를 불안에서 벗어나게 해줬으니 한편으론 잘 된 일 아닌가. 파리는 텅 비었고, 우울하고, 비극적이야. (p. 25)



책을 읽는 동안 'Last Carnival'을 반복 재생으로 틀어놓고 읽었다. 이브의 마지막을, 베르제의 마지막을 떠올리려 애쓰면서. 그리고 예술가란 대체 뭘까. 이 고민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브가 "돌이킬 수 없는 나락"(50면)과 "자기 파괴"(50면)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갈망했던 것. (그리고 그 곁을 떠나지 않는 베르제) 자신을 슬픔과 고통으로 몰아넣으면서도 그것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마음은 무엇일지에 관해. 그리 편지에 '베르나르 뷔페(Bernard Buffet, 1928~1999)'가 꽤 등장하는데, 그의 후기 화풍이 이브의 말년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기도하는 해골>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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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어려운 관계였어. 그러나 누군들 이해할 수 있으며, 이해할 만한 것이란 또 무엇일까? 나는 회사 때문에 너를 떠나지 못했다고 말하곤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내가 너를 떠나지 못했던 건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이지. (p. 31)


무언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두 잊어버려야 해. 그게 내가 끝없이 행한 일이었어. (p. 91)


우리가 원했던 그것, 뇌우와 폭풍우를 지나면서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영원' 말이야. 단 한 번, 너도 알다시피 매디슨 때문에 너를 떠나려 한 일도 있었지만, 바로 그 영원 때문에 실행에 옮길 수 없었어 (p. 101-102)



평생 함께 하던 사람을 보내고 홀로 남겨진 이의 삶과 마음. 이브가 떠나도 베르제 곁에는 이브와 함께 수집했던 수많은 예술 작품과 집이 남아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처분하고 사회에 환원하며, 이브와의 추억을 끊임없이 복기한다. 이브는 베르제에게 보내는 편지 말미에 이런 말을 적었다. "언제나, 앞으로도 영원히, 너의 이브."(101면) 또 베르제는 책의 마지막 편지에 이런 말을 적었다. "이것은 마지막 편지이지만 결별의 편지는 아니야. 어느 날 다시 너에게 글을 쓰게 될지 누가 알겠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아.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를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아."(145면) 이브와 베르제는 떠났지만, 그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남겨진 문장이 영원한 사랑의 증명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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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가라앉는 계절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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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영 도서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직장인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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