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란,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 김초엽, 『양면의 조개껍데기』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는 천선란 작가님의 신간, 『양면의 조개껍데기』는 김초엽 작가님의 신간. 사실 후자는 타이밍이 조금 늦었다. 아무리 읽어봐도 이건 여름 소설이더라. (ㅎㅎ) 작가들의 신간 소식이 기쁘지만, 아마 신선한 충격은 —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같은 작품을 읽었을 때 느꼈던 — 다시 받을 수 없지 않을까 싶다. 그 애정 어린 먹먹함을 다시 경험하고 싶단 생각을 가끔 한다. 어쨌든 믿고 보는 작가님들의 신간 후기.
─ 천선란, 허블
밑동이 휘어진 나무는 그대로 휘어진 채 자란다. 기둥에 파인 흉터는 회복되지 않고* 덮어버리는 방식으로 흉터 위에 벽을 세운다. 그건 새 살이 돋아 상처가 아물어 사라지는 회복과는 다르다. 그래서 상처 입은 나무를 자르면 나이테에 흉터 자국이 혹처럼 남아 있다. 어느 시절에 받은 상처인지 보인다. 상처를 평생 품고 산다. 아물지 않은 채로. (p. 98)
세상에! 예쁘다! 표지가 너무 예쁘다! (그래서 구입해버린)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는 '좀비'가 등장하는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연작 소설이다. 작가님의 연작소설, 『이끼숲』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어 이 작품도 기대되는 마음으로 구입했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지구를 떠난 이주선을 배경으로, 2~3부는 멸망 이후 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들은 멸망 직전의 세계에서 (불행히도) 끝까지 살아남아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자 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작가님의 에세이 『아무튼 디지몬』을 읽으면, 인물의 마음을 더 잘 헤아릴 수 있다. 하지만 작가의 삶을 알게 되면, 작품을 읽는 도중 작품과 분리되어 작가에 관해 생각하는 일은 어쩔 수 없음)
사회에서는 다수가 되면 편하다. 그러니 좀비가 만연한 세상에서는 좀비가 되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살아남으면 어쩌지. 갑자기 살고자 하는 의지가 너무 커져서 끝까지 도망쳤다면? 게다가 약하게 물리거나, 나도 몰랐던 강력한 내성이 있어서 반쯤 좀비가 되면 어쩌지? 마치 영화 <좀비딸>의 주인공처럼 위협적이지 않은 좀비가 되거나,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의 묵호 또는 <우리를 아십니까>의 '나'처럼 생각을 하는 좀비가 되면? 이 책에는 그런 사람들이 나온다. "가장 강하게 끝까지 살아남은 인물들"(297면)이. 살아남는 건 어떤 의미에서 참 슬프기도 하다.
살아 숨 쉬는 존재는 죽음 앞에서는 그토록 평등해진다.
그게 얼마나 위안인가. (p. 260)
너를 두고 가지 않을 거야. 나도 여기에 남을 거야. 어떤 상황에서도 같이 있을게. (p. 270)
이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좀비는 이용되었을 뿐. <1부>에서는 이주선을 배경으로, 아동 학대(가정 폭력) 피해자인 옥주와 묵호의 이야기를 그린다. 어느 날 동면에서 깨어난 옥주는 끔찍한 좀비 사태를 직면하게 된다. 이미 묵호도 좀비가 된 상태였고. 그러나 옥주는 묵호를 피하지 않았고, 묵호도 옥주를 물지 않았다. 이미 서로밖에 없었던 그들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서로를 택한 것이다. 그들은 보호자에게 받은 상처가 미처 회복되지 못한 채, 어딘가 결핍된 상태로 어른이 되어버린다. 서로의 유일한 "욕심"(66면)이 되어 종말을 맞이한 이들의 최후는 얼마나 아름답고 슬픈가.
<2~3부>는 지구를 배경으로, 먼저 2부에서는 비둘기(아버지)가 사라진 뒤, 의식이 온전치 않은 엄마를 돌보는 '나'(제비)의 생존기를 그리고 있다. '나'는 우연히 '은미'를 만나는데, 그녀는 한 쪽 다리를 잃고 정신 발달 장애를 가진 딸(노윤)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애쓰는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인간성은 종말에 이르러서도 빛을 발한다. 마지막 <3부>는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지만, 의식을 지닌 '나'와 좀비인 아내, 그리고 그들이 돌보던 거북이 '장풍'이의 이야기를 다룬다. '나'는 자신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아내가 남겨둔 녹음을 들으면서 추억과 사랑을 떠올렸고, 마지막으로 '나'는 장풍이를 돌려보내기 위해 아내를 카트를 싣고 바다로 향한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듯.
이렇게 설명하니 참 시시하네. 그런데 너도 알지? 이 시시함을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 얼마나 악을 쓰고 버텨야 하는지. 이 모든 시시함, 별일 없이 무난한, 어제인지 오늘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특색 없는 날들이 반복되는 거. (p. 54)
아는 단어의 개수가 더 많다고 해서 더 옳은 말을 내뱉는 것은 아니다. (p. 124)
아빠가 꼭 해주고 싶은 말은, 행동하지 않았다면 마음을 먹은 것만으로는 죄가 될 수 없다는 거다. 마음마저 순결한 사람을 적어도 아빠는 살아오면서 본 적이 없다. 단지 순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열매 같은 거란다. (p. 149)
"시시함"(54면)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하루 악을 쓰고 버티면서. 옥주와 묵호가 "안전한 곳"(45면)을 찾아 헤맬 때, 은미와 노윤이 모두에게 "외면하던 눈길"(187면)을 받았을 때, 나는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소수자가 되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끊임없이 크고 작은 상처들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무심코 내뱉은 말은, 순식간에 생긴 상처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덮어둔다고 해서 쉽게 잊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이테의 "흉터 자국"(98면)처럼. 가끔은 은미처럼 상냥하기를 포기하고 "어설픈 도움"(186면) 따위는 주지 않기로 다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옥을 제 발로 걸어들어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만 있지? 그러니 나는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의 붕어빵 아저씨,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의 비둘기 같은.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나는 달라질 수 있다. "노력"(149면)하면 아직 바뀔 수 있는 일이 있다고.
─ 김초엽, 래빗홀
도망치고 싶은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특별한 불행의 연쇄가 아니어도요. 다들 그랬던 적이 있지 않나요? 눈 감았다가 뜨면 다른 곳이기를 바란 적이요. 지금 여기만 아니면 좋겠다고, 제발 숨을 쉬게만 해달라고요. (p. 355)
어떤 세계든 거기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거야. 밤하늘만 올려다보는 사람들이 있는 거야. 그러니 서로 닿을 수 없어도 먼 곳의 별처럼 말해줄 수는 있겠지.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 그곳이 전부가 아니라고. (p. 367)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훌쩍 떠나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이 세계의 나는 이미 망쳐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고착화된 이미지와 관계를 모두 버리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여기 그런 세계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양면의 조개껍데기』에는 이 세계(현실)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느끼는 이질감은 부적응으로 이어졌고, 이런 섬세함은 꼭 자신을 다치게 만들었다. 적응을 잘 한다는 건 그만큼 "모른 척 눈을 돌리고, 모두가 그러기로 합의"(259면)한 일을 따르는 거니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다수에 반하는 일은 너무도 어렵다. 모두가 다들 그런다고, 그래도 된다고 할 때, 그럼에도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그들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을 멈추지 않았다. <수브다니의 여름휴가>에서 수브다니는 금속 피부가 자신을 헤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달고 미지근한 슬픔>에서 규은은 '세계의 구조'에 관한 탐구를 멈추지 않는다. <비구름을 따라서>에서 이연은 반투막을 건너온 잡동사니를 모으며 그 세계를 꿈꾼다. "다른 사람들이 그걸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51면)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위험을 감수하고 무모한 일을 벌이기도 한다고.
그 세계는 잔잔한 슬픔과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반짝이는 것들도 있다. 나는 그 세계의 슬프고 반짝이는 것들이 나에게로 건너오기를 기다린다. (p. 106)
원래 우리 언어는 불완전하잖아요. 기록도 불완전하고요. 아무리 애써도 문자로 전하고자 하는 의미에는 왜곡이 생겨요. 우리는 문자 그 자체에 담긴 정보로만 서로 소통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문자를 이렇게 수많은 다른 꼴로 새기는 거예요. 문자로는 마음을 온전하게 전달하지 못하니까, 더 잘 전해보고 싶은 거예요. 어렵죠? (p. 127)
어쨌든 수족관은 싫었다. 거기 갇힌 고래들은 별로 행복하지 않을 테니까. (p. 155)
인간은 살아가는 매 순간 너무 많은 것과 상호작용하고, 그래서 너무 많은 것을 상처 입히는 존재라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움직임마다 이 세계 전체가 몸에 감겨든다고. 누구도 원해서 태어나지는 않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이 세계에 연루되기 시작한다고. (p. 358)
가장 좋았던 단편은 <소금물 주파수>였다. 울산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돌고래 '해몽'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해몽은 진짜 돌고래가 아니라 생태 탐사용 로봇이다. 생태 연구자인 모아의 할머니가 사랑으로 만들고 가르친. 업데이트 오류로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린 해몽이 잠시 육지로 돌아왔다가 다시 너른 바다로 향하는 따스한 과정을 담고 있다. 비록 할머니는 떠났지만, 해몽은 모아의 목소리를 듣고 할머니의 향수를 느낀다. 할머니의 찬란한 열정과 사랑으로 존재할 해몽. 오래도록 깊고 넓은 바다를 헤엄쳤으면 좋겠다.
그 애는 왜 바다 깊은 곳을 좋아했을까.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곳. 내가 어떤 존재인지 신경 쓰지 않는 곳. 아무도 나에게 너는 그런 존재냐고 묻지 않는 곳. 그곳에 사는 생물들에게 나는 그냥 거대한, 혹은 조그마한 외계 생물체일 뿐인…… 그런 곳이어서.
그 사실이 편안해서.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p. 102)
왜 모든 것이 거짓에 불과한 세상에서,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느낄까? (p. 257)
그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사물들이 말하는 세계에서 목소리를 듣지 못해 외로울 때마다 나는 그 순간을 생각했다.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지상에서 가득 펼쳐진 거미줄 위에서, 오직 나 혼자서 그 거미줄을 친 존재를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들을 눈치챘기 때문에 나에게만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라고. (p. 235)
<양면의 조개껍데기>에서 레몬이 좋아하던 "바다 깊은 곳"(102면), <소금물 주파수>에서 해몽의 "물의 세계"(173면), <고요와 소란>에서 서영과 해겸이 잠겨 있었던 "고요함"(234면), <비구름을 따라서>에서 이연이 찾아 헤매던 "녹색 세계"(359면)는 모두 그들을 괴롭게 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들의 전부였다. "살아 있다는 느낌"(253면)을 주는 곳. 그러니까 너무도 외로울 때, 다들 원하는 곳으로 멀리멀리 갈 수 있기를. 나는 이제 사람들을 보내주는 것이 더 나은 사랑의 방식임을 안다. "밤하늘의 별처럼 멀리 있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할 수 있"(178면)으니까. 어쩌면 그게 "더 나은 사랑의 방식"(178면)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이미 떠나버린 사람들이 "한 번은 돌아"(159면)오기를 바란다. 그래서 다시 아주 멀리 나아갈 수 있기를.
https://youtu.be/EPKpj_Sm4oE?si=mdzHUTbUvcZyspDC
마지막으로, 『양면의 조개껍데기』의 <진동새와 손편지>는 이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전시를 함께 봐야 비로소 완성된다.
+) 여담으로 예전에 동물권 관련 책을 몇 권 읽었던 적이 있다. 그 후로는 『양면의 조개껍데기』<소금물 주파수>의 모아처럼 수족관(또는 동물원)에 가는 일이 예전처럼 기쁘지만은 않게 되었다. 동물을 마냥 귀여워했던 나의 마음이나 행위도 반추하게 되었고. (내가 길가의 고양이에게 얼마나 자주 카메라를 들이밀었던가?) 이런 마음을 가져도, 또 살다 보면 쉽게 잊거나 불가피한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래도 가급적 소비하지 않고 그 슬픔을 헤아리려 애써보자고 다짐한다.
안다. 피곤한 일이다. 그냥 남들 사는 대로, 대충 즐기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291면)는 것이다.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다수에 맞서보려 부단히 노력하는 소수가 있다. 예민한 내가 답답할 때마다 그 간절함을 떠올리려고 한다. <고요와 소란>에서처럼 사물이나 동물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 이것도 인간의 주관적 해석에 불과했을 수 있지만 — 삶은 괴로움과 후회로 가득 찰 것이다. 살아가는 일은 정말이지 "만물에 빚을 지는 일"(212면)이니까. 그러니 끊임없이 자문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태도를 견지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아십니까>의 '나'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장풍이들을 바다로 보내줘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