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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 기록

읽음의 행위 끝에 도출한 결론이 틀렸을 가능성

구병모, 『절창』

by 박은영



SE-271f3a7c-d641-4fe4-b912-c9d9486ec5e0.png?type=w1 ※ 해당 게시물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병모 작가님의 신간 『절창』은 근래 가장 핫한 베스트셀러. 일단, 읽고 나면 드는 생각은 —그래서 걔가 대체 뭘 읽었는데?— 의문이 가득 남겨진 채로 끝나기 때문에 나처럼 열린 결말을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면, 다소 답답한 여운이 오래갈 작품. 작가님의 강력하고 풍부(내지는 만연)한 문체로 처음에는 적응이 힘들 수 있으나, 작가님 작품을 몇 번 읽어본 독자라면 금방 몰입하여 완독할 수 있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파과』보다 문장에 수식이 많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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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창

─ 구병모, 문학동네


상처 없는 관계라는 게 일찍이 존재나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며, 이제 나는 상처를 원경으로 삼지 않은 사랑이라는 걸 더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 상처는 필연이고 용서는 선택이지만, 어쩌면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 인해, 상처를 만짐으로 인해, 상처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p. 344)



이 책은 '나'가 입주 튜터 면접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면서 시작된다. 그것은 그녀가 가르칠 아가씨가 타인의 상처를 만져서 "읽는" 다소 잔인한 과정이었으며, 곁에 있는 보스(문오언)가 이 일을 주도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통제와 감시로 가득한 공간에서 소녀와 독서 수업을 하며, 그들의 사연을 대략적으로 듣게 된다. 보육원에서 힘겹게 자란 아가씨는 어느 날 상처를 만지면 타인을 읽을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우연히 그 능력을 알게 된 문오언이 그녀에게 새로운 인생을 주면서 그들의 관계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잔인하고 부도덕한 행위에 그녀의 능력을 악용하면서도, 절대 그녀를 함부로 하지 않고 소중하게 대해준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는데, 그녀는 그가 "사회에 해악이 되는 행위"(258면)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 게다가 그녀가 의지했던 기타 선생님과의 일을 계기로 오언만은 절대로 "읽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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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언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나는 그토록 아니고 싶었던 마음이 실은 더할 나위 없이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아무리 모르고 싶어도 그렇게 소중하게 대해주는 것까지 모를 수는 없다고. 그럼에도 그건 그거고, 오언이 사회에 해악이 되는 행위를 기왕 저질렀으면 나만은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를 설득해서 중단하게 해야 한다고. (…)

우리 사이에 처음부터 잘못 기입된 글자를, 늦었지만 이제라도 지우고 고쳐 써나갔으면 좋겠다고. (p. 258)


신이라는 건 있잖아, 그냥 하나의 오래된 질문이라고 생각해.

(…)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누구도 답을 알아낸 적 없는 질문. (p. 285-286)



과연 우리는 오언을 사랑할 수 있는가? 내가 가장 경계하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러니까, 범죄자가 "왜 그런 짓"(286면)을 하는지 알게 되면 뭔가 변할까? "이유가 명백하면"(286면) 이해나 동정의 범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 그러나 "세상에는 어떤 이야기도 부여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286면)이 있다. 오언의 입장이 끝까지 서술되지 않는 것. 아가씨가 끝까지 "중요한 물음"(287면)을 외면한 것. 그 해답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그를 이해하게 되어버리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사람의 마음이란 그런 거니까. 그래서 이런 글은 대체로 비도덕적 행위의 주체—그것이 독자가 사랑하는 주인공이라 할지라도—가 파멸의 길로 향하면서 끝나고, 남겨진 독자는 속절없이 그 파멸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이나 <헤어질 결심>처럼.


운전자(오언)이 조수석에 있는 사람(아가씨)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회전을 했다는 뻔한 설정도 지나치게 힘들고, 그녀가 그를 읽기는커녕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해보지 못한 채로 오언이 죽어버렸다는 것도 괴로웠다. 마음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그 목적지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대체 어찌 무던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처럼 문오언도 강력했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오히려 기타 선생님이 궁금했다. 기타 선생님은 아가씨에게 도덕적 구원을 마련해 주려고 했던 최초의 어른이었으니까. 관계를 맺을 때 "눈에 띄게 선부터 그어놓고"(175면) 시작하는 '나'가 곁을 내준 "유일"(175면)한 상대였던 남편과 그녀의 인생에 관해, 또 천성이 나쁘지 못해서 약자와 부도덕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오랫동안 생각했다. 입주 튜터인 '나'의 정체가 밝혀지면서부터는 등장인물에 관한 감정이 하염없이 요동쳐 감정을 배제하고 판단하기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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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는 굳이 그것을 훼손할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펜을 들어 글을 쓰는 순간부터 재구성이라는 명분으로 변질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와 심장이 그리 안전하지도 무결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온 우주에서 제일 불안정한 공간임을 상기하면, 뭐라도 말하거나 쓰는 편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거나 쓰지 않기보다는 한 발자국만큼이나마 낫습니다. (p. 9)


무언가를 읽을 때는, 읽음의 행위 끝에 도출한 결론이 틀렸을 가능성*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물며 무언가가 아닌 누군가를 읽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p. 14)


오답이든 정답이든 간에 뭐라도 답이라는 걸 내놓는 게 미덕 내지 당위로 여겨지는 독서 교육의 풍토와, 그에 따라서 주제—눈앞의 이 텍스트는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가? —에 대해 정확하고도 안심되는 길잡이 및 인물 행위에 대한 명료하고도 공감되는 설명 내지 그것의 총합 결론 격인 교훈이 책 안에 모범 답안처럼 직관적으로 제시되기를 기대하는 독해 경향은, 지금부터 꺼낼 이야기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는 않으니 다음 기회로 말하기를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 일의 처음은 '읽는'데에서 비롯했기에, 나는 그 행위의 목적어가 어떤 사태와 사람에 닿아 있다 할지라도, 본질적인 오독을 전제하지 않고는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 p. 15)


말하자면 책을 읽고 반드시 무언가를 느껴야만 하는 것인지, 인간은 바로 그 지점부터 문제 삼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고정관념과 강박의 소산 아닐까요? (p. 167)


책을 읽었다 하여 훌륭한 인간이 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때로는 뱀의 몸통을 손으로 붙잡는 식으로 책을 이상하게 읽고서 오히려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인간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보통은 책을 읽고 난 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일어나기 쉬운 일입니다. 무용하면 무용한 대로 다만 이어가는 것, 그것이 읽기 아닐까요. 읽기의 자리에 살기를 넣으면 어떻습니까. (p.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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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처럼 영화화가 된다면 매력적이지 않을까 싶다. (사실 영화는 안 봤지만) 개인적으로 스토리라인보다는 문장 중간중간에 숨어 있는 '독서' 내지는 '읽기'에 관한 사유가 좋았다. 왜 우리는 책을 읽는가? 책을 읽고 나면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는 기대가 무색하게도 읽기 전후의 나는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아는 게 많다고 해서 더 옳은 행위를 한다거나, 좋은 사람이 된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오만한 태도로 일관하거나, 지식을 악용하는 사람을 종종 만나기도 하니까. 게다가 읽기는 필연적으로 왜곡과 오독을 전제하며, 텍스트를 온전하게 읽는 일은 불가능하기도 하다. 이 작품도 그것을 전제로 하는데, 아가씨와 오언의 관계가 '나'에 의해서 서술되기 때문이다. 필연적인 왜곡이 동반되는 이야기 속에서 뚜렷하게 남는 것은 "질문"(286면)뿐이었다고.


그러나 읽는 것도, 사는 것도 대체로 그렇지 않은가.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풀네임이 등장하는 건 "문오언"뿐이다.—어떻게 이런 이름을 생각해 내셨을까—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오언(烏焉)은 서로 글자 모양이 비슷해서 틀리기 쉬운 글자를 뜻한다. 텍스트를, 나아가 타인을 읽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끝없는 오언(烏焉)을 맞이하게 된다.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문장과 인물은 너무나도 많고, 때로는 나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로 무의미한 삶은 지속되니까. 하지만 뭐 상관없지 않나, 비극이든 희극이든 "어차피 다 거짓말이니까."(141면) 우리가 오해 속에서도 "생각"(61면)하는 일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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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도 안 되는 인간의 이야기를 읽고 절대 이런 인간만큼은 되지 않아야겠다면 그걸로 우선 땡큐지. 지금 이 소설 속의 못난이나 미친놈들을 마음 다해 사랑해 주라는 것도, 공감하거나 이해하라는 것도 아니야. 무언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보는 건 어떨까, 우리. (…) 또는 누군가를 비로소 이해하는 것은 그가 행하거나 그를 둘러싼 모든 사태가 끝장나기 시작할 때지. 그러니 우리는 불이해 혹은 오해를 이해인 양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게 고작이야. 이해란 자기만족에 불과할 수 있고, 나의 이해와 타인의 이해는 서로 달라서 둘의 이해가 충돌하게 마련이니까. 공감? 그저 옳지 옳아 끄덕끄덕하려면 책 같은 거 왜 읽는데. 그러니 네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그 이상함을 제공하는 것이 책의 일이며, 이상함의 원인을 분석하거나 때론 원인 따위 결국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자기 자신만큼은 이상해지지 않겠다는 마음에 이르는 것이 읽는 사람의 일이야. (p. 301-302)






『파과』나 『파쇄』같은 결의 작품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나는 사실 『위저드 베이커리』나 『한 스푼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 이런 신비하고 따뜻한 작품이나, 『네 이웃의 식탁』같은 서늘하고 날카로운 작품도 한 편 더 써주셨으면 좋겠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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