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achmaninoff 'Vocalise'
언어는 때로 감정의 깊이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걸작, 보칼리제Vocalise, Op. 34, No. 14는 바로 언어가 멈춘 그 지점에서 탄생한 곡입니다. 이 곡은 14개의 가곡을 모은 작품집 작품번호 34의 마지막 곡인데, 작곡 시기는 다른 곡들과 조금 다릅니다. 앞선 열세 곡이 1912년에 작곡되었고 보칼리제는 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이 한창이던 1915년에 작곡되어 이 작품집의 마지막 곡이 되었습니다.
이 곡은 당대 러시아 최고의 소프라노였던 안토니나 네츠다노바에게 헌정되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네츠다노바가 악보를 받아 들고는 "왜 가사가 없나요?"라고 묻자 라흐마니노프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목소리와 해석이 그 어떤 단어보다 더 훌륭하고 정확하게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데 굳이 가사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이는 그녀에 대한 최고의 찬사이자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음악의 본질을 꿰뚫는 작곡가의 확신이었습니다.
보칼리제는 본래 '아'나 '오' 같은 하나의 모음으로만 노래하는 발성 연습곡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이 단순한 형식을 빌려 아름다운 예술가곡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곡 전반에 흐르는 애수 띤 단조의 선율은 시베리아의 끝없는 설원이나 러시아 특유의 우수를 연상시킵니다. 1915년이라는 작곡 시기를 고려해 볼 때, 전쟁으로 인한 상실감과 불안, 그리고 다가올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이 말 없는 선율 속에 녹아들었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단어로 슬픔을 한정 짓지 않았기에 듣는 이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이 선율에 덧입힐 수 있겠지요.
흥미로운 점은 이 곡이 성악곡으로 작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기악곡으로 더욱 널리 사랑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라흐마니노프 자신도 이 선율의 기악적 가능성을 꿰뚫어 보고 직접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특히 첼로나 바이올린으로 연주될 때 그 호소력은 배가되는데 인간의 목소리와 가장 닮았다는 첼로의 중저음이 보칼리제의 긴 호흡을 타고 흐를 때면 원곡 이상의 묵직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결국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선율이, 음악이 가진 힘 때문일 것입니다. 가사가 없기에 국경과 언어를 초월하고 구체적인 이야기가 없기에 모두의 슬픔과 그리움, 아름다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리움이 차오를 때, 1915년 라흐마니노프가 남긴 이 '말 없는 노래'가 더 깊게 우리의 가슴을 파고듭니다...
지난주에는 외할머니를 뵙고 왔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가면 반겨주시고 증손녀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얼굴을 쓰다듬으셨고 제 남편이 저한테 참 잘한다며 "예쁘다, 예쁘다"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던 할머니셨습니다. 그랬던 분이 이제는 식사도 못하시고 말씀도 거의 잃으셨습니다.
할머니는 8남매를 낳아 7남매를 길러내신 강인한 분입니다. 아주 어릴 때 병으로 잃은 아기 하나를 가슴에 묻고 남은 7남매를 모두 출가시켜 손자를 보고, 그 손자들이 또 자라 증손을 안겨드렸지요. 우리 가족이 다 모이면 40명이 훌쩍 넘습니다. 3년 전, 고관절이 부러지는 큰 사고를 당하셨을 때, 아흔이 넘은 고령의 나이에도 수술을 견디고 기적처럼 다시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셨던 할머니셨는데 말입니다.
30여 년 전, 외할아버지가 뺑소니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며 할머니는 혼자가 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참 자상한 분이셨습니다. 엄마를 '애콩이'라는 귀여운 별명으로 부르셨지요. 엄마가 결혼해 아이 엄마가 되었어도 할아버지에게는 여전히 '애콩이'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엄마를 놀리느라 아기였던 제 다리를 일부러 삐뚜름하게 놓고는 "민지 다리가 짝짝이다. 애콩아, 어쩌냐. 네 딸 다리가 짝짝이야." 하시며 다리를 주물러 주셨다고 합니다. 어쩌면 제가 이렇게 키가 큰 건 그때 할아버지의 마사지 덕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할아버지가 아빠로는 100점이지만 남편으로는 50점이라고 할머니는 농담처럼 말씀하시곤 했지만, 어찌 그 마음이 다 진심이셨겠습니까. 세상 풍파를 함께 이겨내던 옆지기가 하루아침에 사라졌을 때 할머니는 얼마나 막막하셨을까요. 아직 출가하지 않은 자식들을 위해 할머니는 벽돌공장에 나가 일하시며 막내 외삼촌까지 모두 결혼시키셨습니다. 그뿐인가요. 바쁜 자식의 자식들을 돌보고 키워주셨지요. 저도 어릴 적 잠시 할머니 댁에서 자랐습니다.
2호선 낙성대역에서 내려 언덕을 한참 오르면 맨 꼭대기에 있던 할머니 집이 생각납니다. 할아버지가 직접 지으셨다는 2층 양옥집. 조그만 마당과 장독대를 잇는 좁은 길과 돌계단들은 꼬마들에게 최고의 미로였습니다. 사촌들이 1, 2살 터울로 골고루 많았던 우리는 명절이면 할머니 댁에 모여 베개싸움을 하고 마당을 누볐습니다. 엄마가 둘째 딸이라 제가 나이순으로 네 번째였기에, 저보다 어린 동생들 밥을 먹이고 씻기며 나름 대장 노릇도 했지요. 언덕길을 뛰어 내려가 놀이터에서 사촌들과 함께하던 얼음땡, 돈가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놀이들과 그때의 즐겁고 명랑했던 기분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딸 넷을 두셨지만 모두 손자만 낳아, 저는 할머니의 유일한 외손녀입니다. 사랑을 참 많이 받았지요. 할머니 목 뒤에는 새끼손톱만한 살색 점이 하나 볼록하게 솟아 있었는데, 저는 어릴 적에 그 점을 만지는 걸 참 좋아했습니다. 이번에 할머니를 뵈러 갔을 때 문득 그 점이 생각났습니다.
"엄마, 할머니 목 뒤에 그 점 그대로 있겠지?"
"그럼."
하지만 이제는 어디는 손길이 살짝만 닿아도 아파하시기에, 그 그리운 점을 보지도 만져보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할머니 침대 옆에서 가만히 손을 살짝 잡고 있다가 일어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4년 전 할머니 생신 때, 외국에 있던 친척들까지 모두 날짜를 맞춰 모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이렇게 우리 가족이 다 같이, 할머니와 함께 모일 수 있는 날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이별이란 필연적이지요. 그리고 할머니가 너무 아파하시니 어쩌면 이별이 좀 앞당겨 와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또 생각만으로도 이별은 너무 슬프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리움이 먼저 차오릅니다...
오늘은 할머니를 생각하며 음악을 골랐습니다.
대문사진 - 박수근, <가족>, 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