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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우야요 Jul 17. 2021

봉사자를 모집합니다.

전 세계에서 제일 내가 힘들어하는 일은 남에게 부탁하는 일이다.

식은땀이 나고 긴장하고 숨소리도 거칠어지고 누군가에게 ‘이것 좀 해주세요!’ 이 말이 너무나도 힘들다.


우리 박물관은 봉사자의 역할이 80%가 넘는다. 코로나로 인한 봉사자의 이탈은 고스란히 몇 명 안 되는 직원의 몫이 되었다.

특히 코로나의 영항으로 전시해설이 사라졌다. 그러면서 전시해설 봉사자가 떠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도서관 봉사자들의 박물관에서의 역할이 커졌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도서관에 대한 전반적인 관리는 나다. 그렇지만 도서관 봉사자들께 박물관의 다른 일을 부탁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특정 요일이 되면 봉사자들께 어떻게 부탁드려야 하나 고민 고민에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디자인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고 전시 동선에 맞는 조형적인 공간에 대한 고민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라 구멍 난 자리를 어떻게 도서관 봉사자님께 부탁을 드려서 해야 하나?라는 스트레스에 밤잠을 설쳤다.

도서관 봉사자들이 온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전시해설 봉사자가 점점 줄면서 박물관 내애서 가장 큰 집단이 되었다.


남들 눈에는 도서관 봉사자들은 책만 읽고 편하게 있다가는 모습으로 보였고 그들에게 다른 봉사를 요구하는 것도 '괜찮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다른 봉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도서관 봉사자들도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박물관에서는 그들이 비워진 남은 자리를 도서관 봉사자들이 채우기 바랐다.

어찌해야 하나? 내가 지혜롭게 역할을 잘해야 하는데…. 솔직히 이런 일에 자신이 없다. 직장 생활하면서 철저하게 주어진 프로젝트만 만들고 키워나갔지, 많은 나보다 나이 많으신 봉사자들을 케어해주는 역할은 해본 적이 없다.

어렵다. 그들이 도서관에서 고생한다는 것을 모르는 현상도 그렇고 같이...


언제든 박물관에서 봉사하고 싶으신 분은 가운데 초록색 장소로 찾아오셔서 '아우야요'를 찾아주셔요. ㅎㅎㅎ


난 다른 내 본연의 일을 너무 잘했다.

그리고 요즘 나는 3개의 자아를 발동해야 했다.

초등교육에 맞는 교재를 만들어야 해서 초등학생과 같은 자아를 만들어야 했고

어르신들을 위한 교육을 위해 어르신들의 사고를 생각해야 했고 청년들이 전시를 보게 하기 위해 청년들의 눈높이를 맞춰야 했고….

이러다가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디자인이 나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래도 뭐 난 잘하니까… 그냥 다하지 뭐! ㅎㅎㅎ'


코로나가 박물관을 어느 날 찾아왔다.

그동안 정말 정말 대응도 잘했다. 방역도 철저히 했고 입구와 출구도 게이트 하나만 개방하여 통제했고 장비의 도입으로 열체크 및 합리적인 감시를 시작했다.

하지만 박물관 밖은 1,000여 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박물관 안에서가 아닌 퇴근 한 직원이 다른 곳의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확진이 되었다.

결국 박물관 안의 밀접 접촉자가 생겼다. 박물관 직원들은 각자 선별 진료소를 찾아 코로나19 검사를 하였다.

 

휴가였다. 바이러스 때문에 어디 갈 곳도 없고 뭘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가족들이 지방에 내려가려 준비를 하는데 사무실에서 긴급 연락이 왔다. 난 쉬는 날 회사 전화받는 것을 무척 싫어해 가끔 화도 냈다. 그런데 이번 전화는 코로나 19 검사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 가족은 지방에 내려갈 수가 없었다. 내 결과가 혹시나 확진으로 가면 다 검사를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난 보건소를 찾아 검사를 받고 정말 더운 요즘 방안에 혼자 선풍기 하나 들고 자가격리를 했다. 조마조마했다. 확진되면 벌어질 사태에 대해 오만 상상을 다했다. 영화 수십 편의 시나리오를 쓸 정도로 많은 양의 상상을 했다.

사무실 밀접접촉자들은 바로 14일의 자가격리가 실시되었다. 아무래도 봉사자도 직원도 많이 모자란 상황에서 더 정신없어졌다.

다음날 아침 9시 35분에 음성판결이 나왔다. 난 안도의 숨과 함께 고민을 했다. 결국 고민 끝에 난 바로 출근을 했다. 그리고 가족들은 최소 인원으로 지방의 장례식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휴가를 뒤로 미뤘다. 박물관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 나중에 백신 맞고 바이러스가 좀 잠잠해지면 그때 좋은 곳으로 휴가를 가자!"라고 집에 계신 양반에게 말했다.


박물관은 방역당국의 지침에 따라 지금 잘 열고 열심히 사회에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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