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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우야요 Nov 29. 2020

With Concert

from pain to Hope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창작의 고통에 힘겨워하는 우리 박 팀장님!" 부관장님께서 말을 거셨다. 난 일장 연설을 한다. "박물관에서의 디자이너와 작가의 차이점에 대해 아시나요? 작가는 순수하게 자신의 창작물을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에 맞게 만드는 것이고 디자이너는 그 작품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전 작가가 아니라 디자이너입니다.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해가 없이 전시디자인을 하라는 건 제가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제 상상력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올해 코로나 19에 의한 전시가 밀리는 바람인지 아니면 뭔지 모르지만 모든 전시를 20일 간격으로 끊고 가는 이 2020년 이상한 일정 중에 마지막 전시 준비 중이다. 작가님께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료 없이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현상이 전시디자인이 먼저 디자인되기 전에 새 전시가 시작된다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중간에 함께 해주어야 할 학예사들은 없고 뒷짐 짓는 분들만 있는 이 상황, 그래도 만들어 보겠다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학예사에게 같이 잘해보자고 말을 걸었다.
"또, 뭐, 그냥, 다 되겠지!"
 
보통 박물관 식구들은 토요일 일요일 근무가 달라 휴가를 가거나 하면 4, 5일 정도 못 보는 경우도 있다. 토요일 근무하면서 작가를 뵈러 다녀와야겠다 생각했는데 담당 학예사가 그날은 휴무라 말을 못 하고 있었고 난 일요일 휴무여서 서로 만날 날이 주를 넘어 화요일이 되었다. 화요일 출근하자마자 난 부관장님의 명을 받아 바로 대전에 있는 작가님을 뵈러 갔다. 작업실은 생각과 다르게 창고 같고 정리가 안된 듯한 느낌의 작업실이다. 공학박사이신 남편의 도움을 받아 레이저 아트를 선보이는 작가님은 10대 소녀같이 말씀을 하신다. 레이저 아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는 우리에게 간단한 설명과 함께 시연까지 보여주셨다. 기존 작품들과 다른 것은 장소에 따라 레이저의 도달 범위나 색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 장소에 맞는 작품을 설치기간 동안 또 만드신다고 한다. 레이저 아트 이해하기 힘들지만 재미있을 거 같기도 하고 내가 어떻게 이 작가님의 작품을 또 다른 디자인으로 표현해 낼 수 있을지 한참을 보고 듣고 또 보고 영상에 담아보고 사진을 찍어보고 정말 기대되는 것은 레이저 아트는 작가님의 감각이라는 것이다. 우리 박물관을 어떻게 이해하셨고 그 공간에 레이저를 쏘실지 궁금하다. 빨리 전시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이번 공연 브로셔이다. 꽃이 흩날리는 느낌을 표현했다. 우리 모두가 손을 잡고 이 시기를 이기자는 의미와 꽃송이 다발의 선물을 의미한다.


음악회를 했다.
이 음악회에는 세계적인 뮤지션들이 참여를 했다. 팬데믹 시대에 With Concert - from Pain to Hope이라는 주제로 난 뮤지션이 아니지만 이 콘서트를 이미지화시켰다. 먼저 기획팀에서 나온 기획을 가지고 또 다른 디자인 기획을 한다. 디자인 기획은 선물이다. 그것도 꽃 선물!..... 이 꽃 선물이라는 아이디어는 박물관을 지나던 중 봉사자님께서 나에게 지쳐 보인다고 힘내라고 천일홍을 가지고 꽃송이 다발을 만들어 선물해주셨다. 그리고 브런치 작가님께서 박물관에 방문하실 때 말린 장미 꽃송이를 ‘노숙자 예수’ 조각상 밑에 선물해 주셨다. 이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난 아우야요 작가에게 그림 의뢰를 했다. "우리가 손잡으면" 그림책 작가인 아우야요 작가는 부캐의 능력을 발휘해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기획팀에서 나왔던 손을 맞잡는 기획! 이 시기에 오히려 손을 맞잡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우야요 작가가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 그림을 내가 디자인했다. 아우야요 작가의 작품이 빛나게 색감 및 텍스트 디자인, 액세서리 등을 넣어 완성했다. 시안이 여러 개 만들어지고 그중에 선택되는 선물 같은 메인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또한 메인 디자인이 나오니 이 디자인은 여러 갈래로 뻗어나갔다. 이 메인 디자인으로 난 더 흩날리는 듯한 느낌의 리플릿을 만들었다. 그리고 영상팀에서 영상제작에 이 소스들을 이용했다.
음악회 하기 전 악기를 세팅하고 음향 리허설을 마치는 시간이 꽤 길었다. 이 또한 나와 다른 영역이라 방해되지 않는 영역에서 그들을 도왔다. 음악 하는 사람들은 멀리서 봐도 '음악 하는 사람입니다.'라는 느낌 든다는 것을 이번에 보고 또 알았다. 어찌 되었건 음악회 준비는 잘되었는데.... 잘 되었는데.... 또 바이러스가 창궐했다. 결국 공연은 포털의 한가운데 있는 N사에서 라이브 중계로 독점을 하게 되었다. 관객을 모실 수 없음이 너무도 안타깝다. 도서관 봉사자님들을 뵈면서 죄송하다고 공연에 초대 못 해 드려서 죄송하다고 연신 인사를 하고 핸드폰으로 라이브 보는 법에 대해 한분 한분 가르쳐드렸다. 잘 보셨는지는 모르겠다.
 
일을 하면서 가끔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있다.
공연 당일 아침 정말 정말 왜 그런 행동을 할까?라는 생각이 지금도 든다. 난 공연 스텝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겨울 양복을 꺼내 입고 사무실에 왔다. 그런데 젊은 여직원이 좀 편하게 입고 왔다. 저마다 한 마디씩 던진다. "누구누구 씨는 오늘 공연이 아무렇지 않나 봐!" "집에 다시 다녀와!" 그러고는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내 양복 상의를 그 여직원에게 입히고 크네, 요즘 옷은 유니섹스라 괜찮네 마네.... 난 순간 이 상황이 뭐지? 만약에 내 옷이 맞으면 정말 내 옷 입고 행사 스텝으로 뛰라는 건가? 그리고 난 뚱뚱해서 옷이 큰 옷만 입고 다니는데 내 옷을 정말 여직원이 입는 게 맞는 건가? 저 여직원은 정말 기분이 어떨까? 난 아침에 그 여직원에게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했다. 그 여직원은 괜찮다고 하면서 결국 집에 다녀왔다. 또 다들 한마디를 했다. "이렇게 입고 올 거면 아침에 그렇게 입고 오지 그랬어!" 정말 난 여직원들의 세계를 모르겠다.
 
암튼 공연이 시작되기 전 난 스텝으로 콘솔레이션 홀(Consolation Hall 위로의 공간) 앞에 서서 리허설을 돕고 있었다. 여기저기 기자들과 VJ들이 왔다 갔다 하고 정신이 없는데 어떤 청년이 서서 리허설을 즐기고 있었다. 내내 서서 즐기는 모습이 좋아서 리허설이니 여기 자리에 잠시 앉아 들으라고 권했다. 그 친구는 리허설이 끝날 때 나에게 와서 선물 같은 하루를 선사해 주셔서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했다. 대구에서 무작정 아침에 기차 타고 서울역에 내렸단다. 무슨 사정인 지는 모르지만 힘들었던 일을 우연찮게 빨간 벽돌을 따라오다가 대형 현수막을 보고 무작정 박물관 안으로 들어왔는데 음악소리에 이끌려 지하 3층까지 내려왔다고 그리고 너무나 큰 선물을 받고 자기 자신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감사하다고 말을 한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낯을 심하게 가린다. 화장을 예쁘게 한 연주자 중 한 분이 잠시 내게 와서 리허설 이후 본 공연 사이의 시간에 박물관 관람에 대해 물었다. 떠듬떠듬 설명하고 있는데 이 공연의 리더이신 이우창 교수께서 한대수 선생님께 나를 이 전시의 그림과 디자인을 한 사람이라고 소개를 해주셨다. 겨우 겨우 인사를 하며 쑥스러워했다. 드디어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 여운.... 지금까지도 내 가슴에 남아있다. Nella Fantasia부터 시작된 음악은 행복의 나라로 와 앙코르곡으로 마무리되었다. 비대면 공연으로 시작한 이번 공연은 N사 라이브 나우에서 생중계를 했다. 난 박물관 관람이 이루어지는 시간과 공연시간이 겹치기 때문에 일반 관람객이 무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했다.  박물관의 관람시간이 끝나자 난 나 혼자만의 나만을 위한 라이브 공연을 가슴속에 새기며 보게 되었다. 비대면 공연은 나를 위한 공연 인양 착각하는 날 보며 감동에 젖고 뮤지션들에게 다가가 사인받고 감사인사하고 열렬히 응원해 주었다. 정말 잊지 못할 밤이었다. 뒷정리 의자 나르고 무대 치우고가 전혀 힘들지 않게 느껴졌다. 오히려 행복의 나라로를 흥얼거리며 뒷정리를 했다. 바로 통계가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라이브 나우에서의 반응도 뜨겁다고 관계자들이 고무되어서 알려주었다. 그리고 시작된 뒤풀이에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인사만 드리고 밥도 빠른 시간 안에(9시 이전에 가게문이 닫히기 때문에) 입안에 음식을 털어내고 아쉽게 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집으로 갔다.

박물관 외벽에 좌우 이렇게 현수막을 붙혔다. 이 현수막을 보고 대구에서 청년이 들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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