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만의 만남

[아버지 03] 6년 만에 만난 아버지의 모습

by Fensoner

초등학교 시절 6년 동안 내 기억으로는 아버지와의 전화 통화는 10번 남짓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각 통화 때마다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왜 그렇게 가끔이지만 나와 동생에게 전화를 했을까? 최소한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오는 자식을 향한 그리움이었을까?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한 번을 나타나지도,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여다보지도 않을 수 있나라며 생각이 들다가도 우리 아버지는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를 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이내 더 궁금해하지 않기로 한다.


아버지와 6년 만의 다시 만남을 이야기하기 전 6년 동안의 나와 우리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잠깐 이야기를 해야 한다. 어머니는 내가 6살 무렵 아버지는 집에 잘 들어오시지도 않고 경제적인 활동조차 안 하는 정말 백수에 무엇을 하고 사는 사람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제 멋대로인 사람이었기에 스스로 경제활동을 하셔야 했다. 그래서 근처 옷 매장에서 일거리를 받아다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옷에 단추를 다는 소일거리를 하시는 등 어머니가 당시에 하셨던 일들이 아직도 기억에 난다. 어머니는 성적이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고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교 출신이셨다. 그래서 내가 7살이 되고 나서 동네 아주머니들의 초, 중학생들의 공부를 봐주시던 것을 시작으로 과외를 시작하셨다. 어머니의 가르침이 좋았던 것인지 입소문이 시작하여 어머니의 과외 규모는 웬만한 학원 수준으로 성장했고 초등학교 한 학년에 기본 8명 이상은 있었고 중학생까지 가르쳤으니 어머니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후 3시부터 밤 10시까지 아이들을 혼자 가르치셨다. 이 시절에 나는 내가 잘 산다고 전혀 인식하지 못했는데 내가 청소년기를 지나 고등학교 졸업 때쯤 돌이켜보니 정말 내가 잘 살았구나 그리고 돈 걱정 없이 살았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이 초등학교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머니는 무리한 과외로 편도선 수술까지 받으시며 가정 경제를 책임지셨고 혼자 운전면허를 취득하여 자동차도 구입하고, 우리에게 돈을 아끼지는 않으시면서도 근검절약하시며 돈도 많이 모아놓으셨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지만 6년 동안 내가 우울하지 않고 밝게 자랄 수 있었던 이유는 어머니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바쁘고 힘드셨지만 나와 동생에 대하여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고 우리에게 아버지 때문에 우울하고 힘든 모습 또한 보인적이 없으셨다. 그랬기에 나와 동생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우울해하지도 않고 밝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이 조금 지난 시점에 다시 아버지께 전화가 왔고 나와 동생을 만나고 싶다며 연락을 하셨다. 어머니께 사실을 말씀드리고 아버지를 뵙고 오기로 했다. 이때에는 정말 아버지에 대하여 조금의 미움과 원망도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지금도 내 아내에게 너무 심하게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듣곤 한다. 이 어린 시절에도 나는 눈치가 너무나 없었는지 아버지가 무얼 잘못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지 개미만큼도 알지 못했다. 이 날 동생과 그저 아버지를 오랜만에 만난다는 생각에 신이 났었던 기억만 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 버스로 다섯 정거장 정도면 갈 수 있던 건대입구역에서 아버지를 만나기로 하고 건대입구역에 도착해 동생과 버스에서 내렸다.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는 나와 동생이 오락실 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셔서 오락실에 갔다가 두 번 걸려서 이 두 번 크게 어머니께 혼나고 매를 맞았었다. 인생에서 어머니께 매를 맞은 유일한 날들이었다. 마침 정거장에 내려보니 큰 오락실이 앞에 있었고 동생에게 가서 게임 조금만 하고 가자 말하고는 오락실에 들어갔다. 게임을 하지는 않고 어떤 게임이 있나, 사람들이 게임을 어떻게 하나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놀라서 돌아보니 아버지셨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 오지 않아 정거장 쪽으로 걸어오며 우리가 있나 혹시 몰라 한 번 들어와 보셨다고 하셨다. 오락실에 있었다고 꾸중을 듣기보다 반가운 마음에 아버지와 포옹을 하고 아버지는 근처에 사무실이 생겼다며 우리를 데리고 가셨다. 건대입구역 바로 옆에 서점과 중식당이 있던 빌딩이었다. 이 빌딩 4층에 사무실을 가지고 계셨는데 업무용 책상이 5개 정도 있는 작은 사무실이었다.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시며 이 사무실을 운영하시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단순히 어린 마음에 아버지를 만난 것이 좋아서 아버지가 시켜 주시는 중국음식을 맛있게 먹었고 동생과 아버지 사무실에 있는 컴퓨터로 게임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돌아가는 길에 핸드폰 번호를 알려 주셨으며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하셨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씀드렸고 어머니는 무엇을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으셨다.


그 만남 후 며칠 혹은 몇 주가 흘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며칠 뒤 동생과 아버지 사무실에 놀러 가려고 연락을 드렸다. 아버지는 흔쾌히 오라고 하셨으며 동생과 다시 아버지 사무실을 찾았다. 그런데 처음 보는 한 아주머니가 아버지 사무실에 계셨고 내 동생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아주머니께 인사하라고만 했을 뿐 어떠한 관계인지, 어떤 일을 하는 분인지 조금도 말씀이 없으셨다. 그렇지만 업무용 책상도 아닌 접대용 소파에 앉아계셨다는 걸 보아 직원은 아닌 듯 보였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일반 사적인 관계는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역시나 눈치가 심하게 없는 나는 그 어떤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다. 정말 너무나 단순하게 아버지랑 아는 아주머니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는 아버지 사무실에 있는 컴퓨터로 동생과 게임을 하는데 아버지께서 자꾸 그 아주머니 아이도 게임하게 해 주라며 그 아이를 챙기셨다. 이름도 나이도 그 어떤 것도 모르는 아이를 자꾸 챙겨주라 하시니 불편했지만 동생과 나는 양보하고 그렇게 잠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눈치가 있고 속이 있는 놈이었으면 이 날 집에 오자마자 어머니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어야 했다. 나는 정말 너무나 멍청하고 눈치 없는 놈이었다.


우리 집에서 아버지 사무실이 있는 건대입구역으로 가는 길에 COCO'S라는 패밀리 레스토랑이 있었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한국에 있는 아웃백 혹은 베니건스 같은 레스토랑이었는데 비싸고 좋아 보여서 늘 거기에 가서 밥을 먹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하루는 아버지께 연락을 드려 여기서 밥을 먹자고 말씀드렸었다. 당연히 아버지가 내 어머니와 함께 나오라 이런 말씀은 전혀 하지 않으셨고 어머니 안부를 묻지도 않으셨기에 동생과 약속한 시간에 COCO'S(이하 코코스)로 가서 기다렸다. 곧 아버지가 오셨는데 지난번 사무실에서 만난 그 아주머니와 그 남자아이가 같이 온 것이 아닌가. 코코스를 가서 식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들떠있던 내 기분이 그 아주머니를 보는 순간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불편함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나였지만 함께 테이블에 둘러앉았는데 어머니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 아주머니가 있는 듯한 이상한 장면이 연출되는 것 같아 메뉴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메뉴 고르는 것조차 질려버려서 그 기대하고 기다렸던 코코스에 가서 카레를 시켰다. 음식이 나오고 나서는 그 이후의 일들이 내가 기억하기 싫어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떻게 식사를 마쳤는지, 집에는 어떻게 왔는지 아무것도 기억에 없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만나러 사무실에 놀러 가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지만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께 아무런 말씀도 드리지 않았다. 만약 내가 이 날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더라면 내 미래와 어머니의 미래는 바뀔 수 있었을까? 바뀌지 않았다 할지라도 나는 어머니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어야 했다는 생각과 후회가 지금도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든다. 그렇게 겨울이 오고 어머니와 동생 우리 셋이서 설악산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하기 몇 주 전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불러놓고 물어보셨다. "얘들아, 너희들 아빠가 다시 집에 돌아왔으면 좋겠니? 엄마가 다시 아빠 받아줄까?"라고 물어보셨는데 우리는 조금의 주저함 없이 아빠를 받아주라고 말씀드렸다. 훗날 어머니께 이때 왜 아버지를 다시 받아주셨냐고 물어보았을 때 어머니는 오직 딱 하나 너희들을 위해서였다고 하셨다. 너희들이 아버지 없이 자라는 걸 원하지 않았고 너희들이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로 힘들어지고 안 좋은 영향을 받을까 봐 못난 아버지더라도 너희들 곁에 아버지로 있어주는 게 나을 거다라고 생각을 하시고는 결정을 내리셨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아버지를 그동안 세 번 정도 잠시나마 다시 만나게 된 이후 아버지랑 연락을 하셨었나 보다. 그렇게 아버지는 우리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셨다. 6년 만에 다시 아버지로서 우리 집에 돌아와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정말 단순하게 아버지가 돌아오셨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6년 만에 만나는 아버지 곁에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미리 이상하다고 느꼈어야 했는데, 그리고 자식들한테 그런 모습을 당당하게 보이는 아버지를 이상하게 여겼어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려는 아버지를 보고선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나와 동생은 정말 어렸고 아니 어려서 몰랐다는 이유는 핑계이고 너무나 멍청했고 무지했다. 내가 어머니였다면 이 상황들을 알면서 알리지 않고, 말리지도 않은 우리가 조금은 아니 어떨 땐 많이 원망스러웠을 것 같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시고는 얼마 되지 않아 어느 아침이었다. 특별히 어떠한 일로 아버지와 다툼이 생긴 것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아버지가 내게 심한 말을 계속하셨고 나도 화가 나서 울기 시작했었는데 그렇게 울다가 나도 너무 화가 나서 그 순간 얼굴을 파묻고 옆에 계셨던 어머니한테 아버지한테 이상한 여자가 있다고 이야기를 했다. 나도 지금 돌아보면 왜 이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와 그 다툼이 그 아주머니랑 관련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투고 있었던 것인지 이 기억에 대하여 앞 뒤의 자세한 상황들이 기억은 나지 않고 단지 너무 화가 났으며 어머니께 이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분명했다. 어머니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며 다시 제대로 이야기해보라 하셨고 아버지는 다시 욕설과 고함을 지르며 내게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라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께 사무실에서 처음 그 아주머니를 만난 것, 코코스에 함께 가서 식사했던 것 등을 말씀드렸고 아버지는 당황하시며 바로 집을 나가셨다. 아버지가 나가신 뒤 어머니는 차분하게 내게 다시 물어보시며 그동안 잠시나마 있었던 그 만남들에 대하여 들으셨고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결정 내린 것을 다시 번복하지는 않으셨다. 그 뒤로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셨으며 이렇게 아버지와 다시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까지 살게 되었다.


나는 인생에서 힘든 순간들이 많았지만 너무 힘들고 괴로웠던 순간들이 몇 번 있는데 가끔 인생을 다시 돌릴 수 있다면 혹은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면 이 초등학교 6학년 시절로 돌아가 어머니가 아버지를 다시 만나려 하는 결정을 목숨을 걸고 반대하고 싶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6년간 피와 땀으로 일구어놓으신 모든 것들을 5년 만에 송두리째 날려 버리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의 삶을 다시 철저하게 박살을 내고 늘 그랬듯이 다시 우리를 두고 집을 나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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