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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머리유교걸 May 05. 2021

죄송하다는 말에 관해서

시의적절한 말의 사용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말들은 '시기가 적절한 때에' 해야 한다.

적절한 때에 하지 않으면 그 말을 하게 된 저의(底意)를 의심하게 된다. 

'왜 저런 말을 하지?'라는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하는 물음표 살인마가 되게 한다.


사랑합니다.

알게 된 지 일주일도 안된 사람이 갑자기 사랑한다고 하면, 쎄하다.(쎄이다 풀가동!)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이라는 책이 떠오르는 류의 거부감이 든다. 


고맙습니다.

주문한 메뉴가 나오고, 맞은편 사람이 '고마워!'라고 하고 밥을 먹기 시작하면.. 찜찜하다. '아, 이 밥을 내가 사야 하나?'라고 생각하며 밥을 먹는 내내 고민하고 나는 체하겠지.


시의적절함이 가장 필요한 말 중에 으뜸은 '죄송합니다'라는 말이라는 것을

그분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분은 참 사과를 잘한다. 항상 입에 '죄송하지만'과 '죄송한데' 그리고 '죄송 죄송'을 달고 산다.

그 말들을 촘촘히 뜯어보자.

'죄송하지만'이라는 말은 '죄송하다'와 '하지만' 이 합쳐진 단어다. '하지만'이라는 것은 결국에는 뒤에 오는 말이 나의 본심임을 드러내는 접속부사이다. 앞에 어떤 좋은 말과 아름다운 말을 하고, 칭찬을 쏟아내더라도 '하지만'이 따라오는 순간(!) 듣고 있던 사람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죄송하다'와 '그런데'가 합쳐진 '죄송한데'도 같다.


아, 이야기가 다르게 흘러갔다.


그분이 하는 '죄송하지만' 혹은 '죄송하다'라는 말은 늘 시의적절하지 않은 게,

정말 죄송해야 할 때는 절대 죄송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은 오늘도 나에게 죄송해했다.

'죄송하지만, 저쪽 회사에서 서류를 주지 않네요.' 저쪽 회사에서 서류를 주지 않은 것은 그가 죄송해할 일이 아니다. (기한이 되지 않아 주지 않았을 뿐)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분은 절대 정작 진짜 죄송해야 할 때는 절대 죄송해하지 않는다. 

본인이 담당자로서 최종 검토를 하지 않음으로 인해 회사가 들썩이는 정도의 사고가 났을 때에 그분은 나에게 책임을 미루며 그렇게 입버릇처럼 말하던 '죄송'의 'ㅈ'도 꺼내지 않았다.

아마, 그것이 진심이었을 거다. 진짜 전혀 죄송하지 않았을 거고, 여기서 애매하게 입버릇인 '죄송'따위를 지껄여서 본인에게 올 화살을 원천 차단하고 싶었겠지. 


나는 오늘도 카톡에 깊이 새겨진 그분의 '죄송하지만'이라는 문구를 곱씹었다.

(그분을 씹은 게 아니라 말을 곱씹었다. 어쨌든 뭐든 씹긴 씹었구나.)

본인이 죄송해하지 않아야 하는 부분에 '죄송하지만'이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의 심리에 대한 이런 생각해보았다.


본인이 죄송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죄송하지만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으며

본인이 무척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는 자아도취에 빠지는 것 같다.


그대여. 

'죄송하지만'이라는 단어로 그대에게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죄송하지만, 그대밖에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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