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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머리유교걸 Oct 05. 2021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 시간이 지겨운 건

언행은 일치 가능한 것인가

초중고 12년 동안 주 1회씩은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전혀 기억나는 내용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졸업한 초중고에서 교장선생님은 전교생 조회시간 외에는 딱히 학교에서 볼 수 없는 분이었다. 그분이 좋은 분이었는지, 나쁜 분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냥 학교 내 봉황 같은 존재랄까?

그렇게 이름도, 얼굴도, 성별조차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한 말을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 수도.


어렴풋한 생각은, '좋은 학생이 되어야 한다'라고 했을 거고(어이 거기 뒤에!라고 중간에 외쳤겠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라에 이바지해야 한다'라고 했을 것이다(그리고 헛기침도 한번 했겠지).

그런 말씀을 하는 교장선생님도 딱히 나라에 이바지하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훈화 말씀이 지겨웠던 것 같다.


"OO회사에 이력서를 냈는데 광탈했어요."라는 말에 "그 회사가 학력을 봐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말을 두 달째 반추 중이다.

'내가 주 20시간 계약직 근로자로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하게도 '허름한' 대학을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 것일 거다(실제로 허름한 대학을 나왔다).'라는 추측밖에 할 수 없다. 그 자리에서 바로 "그 말은 어떤 의미예요?"라고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다.


내가 좋은 대학을 나왔다면 그 말을 들었을 때 나의 기분은 어땠을까? 그리고 내가 계약 만료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정규직인데 꿈을 찾아 떠나려 하는 자발적 퇴사자였으면 그 사람은 어떤 말을 했을까?


오늘 싱어송라이터로 지내시는 분을 만나 점심을 먹었다. 그간 작업해온 곡들을 정규앨범으로 발매하고, 이제 그 일을 떠나려고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만큼의 에너지를 쏟은 작업물이 세상에 빛을 보게 하는 기회를 주고 싶고, 그렇게 하고 나면 미련 없이 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나도 두 달이면 충분했다. 이 글을 발행하는 것을 통해, '그 회사가 학력을 봐요'라는 말을 하신 분을 미워하는 것도, 색안경을 끼는 것도, 마음속 냉소를 보내는 것도 이제 다 그만두어야겠다. 기억나지 않는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처럼, 그저 '이력서에서 떨어진 나를 위로하려던 중에 저런 말을 한 것이겠거니.'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이제 미련 없이 이 생각을 접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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