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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약사언니 Jul 25. 2020

막다른 길이었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시기에 유학을 꿈꿨다.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었을 뿐, 나의 생각을 지지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유학을 결정하기에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시기는 너무 애매했고, 무모했다.  


 당시 문과반에 진학하였던 나는 문과 과목을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문과에 진학한 것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문과에서 내가 진학하고 싶은 과나 직업을 찾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무기력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미국은 문과나 이과를 구분 지어 내가 지원하고 싶은 과에 지원하는 것이 어려운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유학이 더욱 간절하게 느껴졌다.    


 마음속으로 유학을 결정한 나는 열정이 있었고, 도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내 앞을 가로막고 있을 장애물들에 대해 인지하고 전략을 구상할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일단 부딪혀보는 것이 계획의 전부였다. 

 그렇게 끓는 젊은 피 만을 의지하며, 나는 홀로 유학을 준비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목동과 강남에 있는 유학원들에 수없는 전화를 돌렸다. 그때마다 전화기 속에서는 “학생이세요?”라는 물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내가 유학을 꿈꿨던 시절은 지금 만큼 인터넷 검색이 활발했던 시절은 아니었기에,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홀로 목동과 강남에 있는 유학 원가를 거닐며 깊은 수심에 잠기기도 했었다. 


 며칠간 유학원들에 전화해보기를 반복하던 나는 동네의 한 유학원에서 한번 방문을 해 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방문한 유학원에서 공립학교나 사립학교에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추천받았다. 이제 부모님께 나의 계획을 말씀드리고 함께 유학원을 방문하는 관문이 남아있었다. 


 아버지께 유학에 대한 결심을 말해야 했던 순간이 단연코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굉장히 엄한 분으로 평소에 말씀도 길게 하시는 편이 아니다. 아버지에게 내 결심을 말씀드리기 어려웠던 나는 어머니께 도움을 요청했다. 어머니는 한숨을 푹푹 쉬셨고, 어머니 또한 나의 결심을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하셨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결국 어머니는 내 성화에 못 이겨 아버지께 내 생각을 전달드렸다. 그 날 저녁, 나는 내 방에서 두려움에 떨며 부모님의 대화를 엿들었고, 머지않아 “안돼!”라는 무거운 대답을 들었다. 그 당시 나에게 부모님의 입장까지 생각해 볼 연륜은 없었다. 내 머릿속은 온통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들 뿐이었다. 나는 부모님의 반대라는 난관 앞에 있었고, 아버지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어머니를 완전한 내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어머니도 이미 아버지께서 반대하신 일에 대항하는 것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셨는지 같이 유학원에 방문해 보자는 나의 제안도 거절하셨다. 어린 나는 상심할 대로 상심한 한 채로 부모님께서 반대하시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답답한 마음으로 상담 차 다시 한번 혼자서 유학원을 방문하였다. 유학원에서는 어머니와 한 번 통화를 해보겠다고 했고, 여러 설득 끝에 드디어 어머니께서 유학원에 방문하셔서 어떠한 유학 프로그램들이 있는지 살펴보시기로 했다.


 그 후, 아버지와 어머니의 끊임없는 대화가 이어졌고, 이 일을 알게 된 학교 선생님, 학원 선생님, 심지어 친척들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어머니, 지금도 잘하고 있는 학생에게 유학이라니요?”

“가족 중에서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도 없는데, 어린아이 혼자서 어쩌려고 하는 거냐? 아범아 너도 고생이다. 안된다." 

"가족끼리 함께 살아야지, 평생 한국에 들어오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미국인이랑 결혼하는 꼴 보려고 하느냐.”


등등 내가 유학을 가면 안 되는 이유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고, 왜 저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인생 방향에 대해 결정권이 있는지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불효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을 때쯤, 나의 강경한 태도를 보시던 부모님은 조금은 화가 난 상태로 결국 나의 결정을 지지해 주시기로 마음을 먹으셨다.


 결정이 난 후로는 빠르게 출국 날짜가 정해졌다. 난생처음으로 부모 곁을 떠나 타지로 떠나는 날, 부모님은 많이 걱정이 되셨는지 공항 에스코트 서비스까지 신청해 주셨다. 에스코트 서비스는 미국에 경유지가 많기 때문에 경유 때마다 공항 직원이 마중 나와 경유하는 항공사 게이트까지 데려다 주어 마지막 도착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는 것을 도와주는 서비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저런 간단한 일에 공항 서비스까지 이용했었나 싶지만, 난생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는 나로서는 에스코트 서비스를 이용했는데도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낯선 언어로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 가도 가도 나오지 않았던 다음 비행기 게이트, 계속 연착되던 비행기, 나와 이별하며 난생처음으로 눈물을 보이시던 아버지, 마음고생을 너무 많이 하신 고마운 어머니와 적어도 일 년을 보지 못할 다른 가족들. 혼란 투성이었다.   


 나는 10년간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단 한 번도 가족사진을 가지고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너무 그리워질까 봐 였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있을 것을 전혀 예고하지 못한 채, 그 저녁 늦은 시간, 마지막 에스코트 서비스를 끝으로 단지 10대 여자 어린아이였었던 나는 정말로 미국 공항에 홀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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