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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약사언니 Jul 25. 2020

약대만 가면 고생 끝일 줄 알았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으며, 인생의 본 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 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을 살지  않으려고 했으니,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 - 월든


 대학만 가면 고생 끝 일 줄 알았다. 대학의 낭만인 엠티나 소개팅같이 분홍분홍 하고 설레는 나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중간고사 기간이나 기말고사 기간에만 바짝 공부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공부밖에 다른 세상을 경험하면서 찬란한 20대를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미국의 대학문화는 내 핑크빛 기대와는 아주 달랐다. 미국 대학에 입학한 순간부터 나의 진짜 공부가 시작되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약대 커리큘럼은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내가 정할 수 없이 이미 짜여 있는 스케줄에 일 년에 관심 있는 교양과목 한 개 정도로 정도만 추가할 수 있는 커리큘럼이었다. 약대에 들어와 쉴 틈 없이 짜인 6년 치의 빡빡한 스케줄을 보고 나니, 이런저런 수업을 들어보면서 대학 수업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 보리라 조금은 기대해 보았던 내 희망사항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들어 한숨이 나왔더랬다.


 6년이란 시간은 초등학교 1학년이 저학년으로 입학하여 6학년인 고학년으로 졸업하는 시간이었고, 가나다를 배우며 받아쓰기 시험을 보던 1학년이 Science fair와 같은 교내 과학행사에서 직접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가설을 입증하는 6학년으로 성장하는 긴 시간이었다.  


 약대에 입학하고 처음 2년, 예과 과정 때는 생물, 화학, 유기화학, 물리, 생리학과 같이 인체 생리를 이해하기 위하여 기본이 되는 학문들을 공부하였다. 전공과목을 한국어로 공부하기도 힘든데 영어로 학문을 이해해서 답안지에 알맞은 답을 풀어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힘든 일이었다. 영어로 된 수많은 의학용어들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찾아가며 공부했다. 수많던 의학용어들은 한국어로 번역을 해서 보아도 무슨 뜻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결국 국어사전까지 동원되었다. 영어로 꽉 찬 원서들을 꼼꼼하게 번역해 가며 공부를 해야 했으니,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들었겠는가.  


 나는 원어민이 아니기에 그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렇게 해야 그나마 따라갈 수 있었기에, 그 날 배운 과목들은 그날 복습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하루하루를 생소한 단어들과 시름을 하느라 대학생활을 즐길 여유 따위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시험을 보는 순간 얼마나 떨렸는지 모른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서관으로 직행했던 나의 일상들의 결과가 시험 점수로 보여지던 날이었고, 온몸을 달달 떨면서 시험문제를 풀었다.


 처음 대학에서 보았던 시험 결과가 나오던 날, 그날은 단연코 내 인생에서 내가 공부에 대해서 가장 큰 좌절을 경험했던 날이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다. 공부는 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는 거라고 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all A 나 all A플러스 학생이 아니었다.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공부 잘하는 아시아인, 공부 잘하는 한국인이라는 타이틀은 더 이상 나에게 어울리는 칭호가 아니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고, 나는 그들을 쫓아가기도 버거워하는 열등생같이 느껴졌다.


 약대 공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우리 학교 약학과를 입학한 한국 학생들 중에 제시간에 졸업하는 학생들은 불과 1/3에 지나지 않았다. 힘에 부치는 커리큘럼이 학생들을 고뇌하게 만들었고, 학생들은 전과를 하거나 다른 학교로 다른 전공으로 편입을 하거나, 유급을 하기도 했고, 몇 년 휴학을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겪어야 했던 6년, 프로페셔널이 되기 위해 수련하는 학교의 커리큘럼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기에, 학생들은 자신의 템포에 맞는 인생을 찾아가기 위해 다양한 선택을 하곤 했다.


 치열했던 약대 생활은 6학년 때까지 끝날 줄을 몰랐고, 학교와 도서관이 나에게는 집보다도 친숙한 공간이 되었다. 나는 보통 학교 도서관에 있는 독방에 들어가서 홀로 하루 종일 공부를 하곤 했는데, 단내가 날 정도로 하루에 말 한마디도 안 할 때가 많았고, 나중에는 외로움에 휩싸여 토가 나올 것만 같은 상황까지 나 자신을 몰아세우기도 했었다. 아무쪼록 대학 가서 고생 끝일 줄 알았던 나의 안일했던 희망사항들이 산산이 부서지던 순간들이었다.


 고독과 외로움,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향연 하였던 시간들을 지나 드디어 졸업반인 6학년이 되었을 때는 또 다른 난관인 취업이라는 벽에 부딪혀야 했다. 미국에서 약사들의 취업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내가 영주권이나 시민권자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나의 신분상의 문제 때문에 나는 나와 다른 약사들을 구분 지어 나만의 특별한 포인트를 부각해야 할 방법들을 찾아야 했다. 그 고뇌의 결과로 비스니스 스쿨에 입학하여 MBA를 복수 전공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나는 약대 졸업 이후에 MBA와 masters of science라는 석사 급의 학위를 2개 더 공부했고, 약대에서 배웠던 자연과학과 신약개발, 데이터 분석에 대해 배우고 싶어서 연구원으로 경험을 쌓게 되었다.


 약대만 졸업하면 고생이 끝일 줄 알았지만, 졸업하고도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너무나 많았고, 그중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후회가 없을지 모두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쉽게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미국 약국에서는 2년간 일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약국 말고도 여러 가지 옵션들을 탐색해 보기로 했다. 내가 나의 능력의 한계치에 대해 선을 긋고 싶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도전을 다 해보고 싶었다. 여러 가지 옵션을 탐색해 보아야 나중에 정착하게 되는 직업에 대한 만족도도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부모님 곁을 떠나서 홀로 유학길에 올라 친척 한 명 없는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리라 선택했고, 사람 생명의 존귀함을 배울 수 있는 학문을 익히고 싶어서 약학 대학교에 진학하겠다고 선택했고, 직업 선택에 갈림길 앞에서는 내 적성에 가장 부합하는 일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경험을 쌓아보기로 선택했다. 무엇하나 쉬운 선택이 없었다.


 학업만 마치는 것이 내 인생 방향에 탄탄대로를 보장해 주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과 현실이 달라 괴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갈림길 앞에서 수많은 선택을 해야 했다. 쉽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는 눈앞의 최상의 길을 선택하기보다 뒤돌아보았을 때 후회가 덜 남을 길을 선택했고, 결국 그 선택들이 나를 최상의 선택지로 데려가 주곤 했다.


 살아있는 한 꿈은 계속될 것이고, 선택지는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그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살아내고, 올바른 선택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할 때, 내 삶이 더 소중하게 느껴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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