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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묘 Oct 08. 2021

언어가 태어날 때(2)

도쿄의 장례업자 M

(전편에서 이어짐)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사이트에 올라가 있는 사진을 통해 이미 내 얼굴을 알고 있었다.


첫인사를 하면서도 그는 전혀 웃질 않았다. 185센티도 넘어 보이는 큰 키라서 그랬는지 검은 양복과 검은 모직 코트, 검은 가죽 가방만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혹시 직업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고객들은 웃을 수 없는 사람들이므로. 그는 어쩌면 무의식적으로라도 웃는 일이 생기지 않게 스스로를 단련시켜왔을지 모른다고 내 맘대로 해석했다.   

  

우리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르누아르’(ルノアール, 일본식 발음은 르노아르)에 가기로 했다. 레트로 분위기의 찻집을 표방하는 프랜차이즈 카페였는데, 아무래도 스타벅스보다는 차분할 것 같다고 했다. 역 밖으로 나오니, 신주쿠 못지않은 도쿄의 번화가 이케부쿠로답게, 거리는 '불금'에 흥청이고 있었다. 9시를 훌쩍 넘긴 불금의 밤거리를, 온갖 일본어 간판이 넘실대는 이 거리를, 이방인인 내가 태어나서 이제 막 처음 한국어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과 함께 걷고 있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일 끝내고 바로 오시는 길인가요?”

“저희 같은 사람들은 일이 있어도 없어도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거의가 이런 복장이지요. 직원으로 고용된 경우라면 퇴근해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집이 곧 직장인 경우라서요.”


옷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아, 그럼 사장님이시네요?”


긴장도 풀 겸 조금 장난스럽게 물었다.


“직원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따지자면 제가 직원이기도 하고 사장이기도 하고 그렇죠. 규모는 작습니다.”

“저, 혹시 한국어는 왜 배우려고 하시는 건지 여쭤 봐도 될까요?”

“음… 오래전부터 외국어를 하나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근데 영어는 도저히 안 될 것 같고, 어떤 걸로 할까 생각하다가 한국어로 정한 거예요.”


비로소 입가에 멋쩍어하는 웃음이 조금 번졌다. 굵고 낮은 목소리. 꾸며내 만든 상냥함은 없지만 말투는 정중했다.  목소리로 한국어를 하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해보았다.


“한국에 가보신 적은 있으세요? 여행이나.”

“아뇨. 해외여행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제가 독립해서 회사를 차린 지가 3년 됐는데, 지난 3년간은 국내여행도 못 가봤네요.”   

“일 때문에 해외여행은 아예 어려우신 거예요? 그럼 한국어를 배워도 당분간은 한국에 가서 쓸 기회가 없을지 모르겠네요?”

“네, 그렇긴 하지만, 꼭 가고 싶은 상황이라면 주변 다른 업체에 부탁을 하고 가는 방법도 있어요. 제게 들어오는 의뢰를 대신 맡아달라고요. 저희 업계는 대형 업체가 아닌 이상 거의 지역 밀착형 사업이에요. 사업장이 소재한 구를 중심으로요. 그래서 사정이 생기면 서로서로 부탁하기도 하고 그러지요. 자주야 곤란하겠지만.”


우리는 카페로 들어갔다. 내부는 무척 넓었지만 빈 테이블은 두 개밖에 없었다. 마침 구석에 하나 있어서 딱이라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흡연석 근처라 별 수 없이 한가운데에 있는 자리에 앉아야 했다. 천장 쪽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재즈가 흘러나오고, 일본어들이 낮고 차분하게 각 테이블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이제 그곳에서 그에게 한글을 가르쳐야 했다. 그의 인생에서 최초로 결합을 시도하는 한국어의 자음과 모음들이 표류하지 않고 그에게 가 닿도록 해야 했다.     


(다음 편에 계속)


미나미 이케부쿠로(南池袋)의 저녁 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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