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에서 온 커플 S와 A
같은 시기에 나는 한국에서, 둘은 오키나와에서 도쿄로 왔다. 직장도 없이 살 집도 없이 그저 서로를 의지해 상경한 이 커플은 셰어하우스의 방 하나를 다시 셰어해서 살았다. 12제곱미터의 좁은 방 안에서 싸우기라도 한 날이면 남자친구인 A는 공용 거실로 나와 밤늦게까지 앉아 있곤 했다. 향수병에 걸려 외롭기도 하고 미래가 불안해 그렇게 싸우기도 했지만, 그래도 의지가지없이 외국에 와 견디는 나를 보고 자신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위로를 받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나야말로 한 학기를 끝내고 너무 힘들어 그냥 돌아갈까 생각할 때 그들로부터 큰 위로를 받았는데, 이 커플을 포함해 워킹홀리데이로 온 한국인 여자아이와 나, 이렇게 넷은 죽이 잘 맞아 곧잘 맥주도 같이 마시고 오키나와 음식과 한국 음식을 같이 차려서 나눠 먹으며 서로를 격려하곤 했다.("이거 진짜 몸에 좋은 거예요. 한 번 먹어봐요."하고 오키나와식 염소 수프를 건넸을 때는 조금 힘들었지만) 사실 이들은 거의 띠동갑에 가까울 정도로 나보다 어렸는데도 늘 언니, 오빠처럼 나를 들여다봐 주었다. 특히 오키나와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했던 A는 내가 이상한 일본어를 쓰면 엄격하고 진지한 얼굴로 고쳐주고는 했다. 아마 각기 호주와 필리핀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었기에 나를 더 보듬어 주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한국인 여자아이가 석 달 남짓 지내다가 먼저 귀국하는 바람에 허전했을 때도 그나마 두 사람이 있어서 견딜 수 있었는데, 5개월을 그렇게 같이 살다가 둘 다 취업을 하고 제대로 된 집을 구해 나가게 되었을 때는 잘된 일임에도 정말이지 너무 슬퍼서 15명이 사는 셰어하우스가 빈집처럼 느껴졌을 정도이다.
이 커플이 나간 뒤 결국 나도 얼마 안 있어 이사를 했고, 서로 사는 일에 치여 밖에선 만나지 못하다가 귀국을 한 달 정도 앞두었을 때 두 사람이 송별회를 열어주겠다고 해 고엔지(高円寺)에서 만나게 되었다. 친절하고 안주도 맛있는 이자카야가 있으니 안내하고 싶다고.
우리는 좁디좁은 술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그동안 어찌 지냈는지, 직장일은 괜찮은지 근황도 나누고 귀국을 앞둔 나의 소회도 나누었다. 두 사람의 이사 직후 S와는 따로 만난 적이 있지만 셋이 모여 술을 마신 건 8개월 만에 처음이었다.
술이 얼근해지자 S가 내게 물었다. 돌아보면 도쿄에서의 생활이 어땠느냐고. 타향살이 힘들진 않았냐는 뜻이겠지.
"나중에 내가 눈 감을 때 인생에서 행복했던 순간들이 영화 속 장면들처럼 지나간다면, 도쿄에서의 지난 시간들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아요. S상이나 A상 같은 사람들을 만난 게 가장 큰 추억 가운데 하나고." (내가 나이가 훨씬 많았지만 우리는 서로 끝까지 존댓말을 썼다)
S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운 마음이 든다며. 그리고 눈물을 닦더니 어딘가 수줍어하는 듯한 얼굴로, 송별회도 송별회지만, 실은 한 가지 보고할 것이 있다고 했다. 그게 뭐냐고 묻자
"우리 이번 달에 혼인신고를 할 예정이에요. 드디어 부부가 된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나 역시 눈물이 났다. 불현듯 둘이 싸워 한 사람은 방에도 못 들어가고 공용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그걸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불 꺼진 거실에서 보지도 않는 TV만 몇 시간째 켜놓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그걸 모를 리 없지.
결혼식 날짜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적당한 시기에 고향인 오키나와에서 오키나와 전통 혼례로 치르려 한다고, 멀어서 와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초대해 전통 혼례 올리는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노라 했다. 신나는 잔치가 될 거라며.
하지만 불과 반년 남짓 뒤에 시작된 팬데믹 상황으로 그들의 혼례는 아직도 치러지지 못하고 있다. 아름다운 오키나와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질 아름다운 그들의 혼례를 하루빨리 보게 되길 나 역시 간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