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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쥐 Aug 06. 2023

목구멍이 포도청입니다

2년 5개월의 연재를 끝내며

한동안 글을 쓸 시간이 없었다.

아이러니게도 깨어있는 시간 내내 글을 쓰고는 있었지만, 남의 글을 한국어로 옮기는 데 시간이 부족한 나머지 내 글은 전혀 쓰지 못했다.


시작은 2년짜리 웹소설 계약이었다.

프리랜서로 살면서 늘 일을 따기 위해 종종거리는 게 싫어지던 참이었던지라 얼씨구나 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그걸 하면 한달에 일정 수입이 보장되니, 나머지 일들은 골라 받으면 되었다.


웹소설 장르는 현판, 그러니까 현대 판타지물이다.

문제는 내가 판타지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판타지가 섞여있다는 이유로, 내 최애배우 공유가 나오는, 모두가 열광했던 드라마 도깨비도 패스한 나인데, 매일매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초능력을 발휘하는 주인공의 무용담을 번역하자니 아,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딘가.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한다. 꾸역꾸역, 도망가고 싶어서 안달난 내 영혼의 멱살을 단단히 붙잡고, 한 글자, 한 문단, 한 페이지를 꾸준히 써내려가면 한달 동안 몇십 만자를 담은 파일이 완성된다. 


웹소설 번역의 장점은 글자당 단가는 낮지만, 딱히 어려운 내용은 없고 흐름을 타서 속도가 붙으면 시간당 단가는 높아진다는 거다. 단점은 호흡이 너무, 너무너무너무너무 길다는 것. 계약기간 2년이 말이 쉽지 휴가도 없이 계속해서 납기를 지키며 일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나는 그 납기를 지키면서 해외 이사도 했고, 이번에 6주 동안 한국 방문도 했다. 말인즉슨, 굵직굵직한 일정이 있을 때마다 분량을 땡겨 번역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오랜만에 한국까지 가서 책상 앞에서 일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려면 그 일정이 있기 전에, 정말 토가 나오겠다 싶을 정도로 책상 앞에 앉아 기계처럼 번역을 해야 한다. 


번역은 지나치게 정직한 작업이다. 내가 버는 돈은 내가 번역한 글자수에 내 요율을 곱한 금액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게 투명한 일에 너무 매몰되어 있었나 보다. 남들은 주식이니 코인이니 하며 자산을 불려나가고 있었는데...이번에 한국에 나가니 폭등한 부동산 가격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올라버린 자산의 가치 앞에서 내 노동의 가치는 한없이 작아 보였다.


시드머니를 모아서 나도 투자를 해야지! 결심도 해봤지만, 이상하게도 일할 의욕이 자꾸만 없어진다.

그깟 5만원 더 벌어 뭐하나. 그냥 넷플릭스나 더 볼란다 하고 들어온 일을 거절하는 일이 반복된다.

같은 일을 10년 넘게 하다보니 매너리즘이 찾아온 것일 수도, 아니면 비현실적인 자산 가치 앞에 한없이 쪼그라들었던 내 노동을 다시 건드리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그냥 일이 재미없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진짜 이유가 무엇이건, 요즘은 정말 일이 하기 싫다.





이상은 작년에 썼다 서랍에 넣어두고 잊어버리고 있었던 글이다.

문제의 웹소설은 2년도 아니고 장장 2년 5개월을 번역해 마무리했고 나의 영혼은 탈탈 털려 바짝 마른 빗자루 상태가 되었다.


작품 연재가 1년이 넘어가면서부터 언제 끝나나, 언제 끝나나 노래를 불렀더랬다.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이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번역하는 건, 말하자면 내 영혼을 한 자 한 자에 xx원의 값을 매겨 파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작품의 2/3를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작가도 어지간히 쓰기 싫었구나, 하는 게 느껴졌다.

작가님아, 이렇게 쓸 거면 차라리 그냥 끝내버리지 그러셨세요...나는 괴로운 비명을 속으로 질러내며 무뇌 상태로 자판을 두드렸고, 900회 넘게 질질 끌던 이야기는 뿌려놓은 복선 중 절반 이상은 수습도 하지 않고 급히 마무리지어졌다.


이런 글을 번역할 때마다 드는 생각.

차라리 하나 써봐?

내가 그럴 깜냥은 되나? 

행동은 미뤄두고 엉망진창 헝클어진 머리만 굴려보는 나날들이다.



판타지 소설의 번역에서는 벗어났지만 2년 5개월 동안 매달 통장에 꽂히던 월급이 사라진 것은 역시나, 무척 아쉽다.

그렇게 나는 다시 마음이 가난한 프리랜서 번역가 자리로 돌아왔다.

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슬픈 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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