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때도 없이 네이버에서 유방농양을 앓은 사람들의 치료 후기를 찾아 읽으며 나는 고통스러웠다는 환우들의 생생한 후기에 몸서리를 쳤다. 커다란 바늘로 농양을 터트리고 30일 동안 병원에 매일 같이 다니며 드레싱을 갈았다고! 헐랭, 이게 이렇게 심각한 병이었다니.
맞다. 나는 고통과 통증을 참는 데는 전혀 소질도, 그럴 의지도 없는 겁쟁이 무지렁이다.
뒤늦게 Teledoc에서 전화로 의사를 만나 항생제 처방도 받아봤지만, 이미 커질대로 커진 농양은 항생제 따위로 치료될 단계를 넘어서 있었다.
주치의한테 앱을 통해 유방외과 레퍼럴을 써달라고 했더니, 흔쾌히 써주었는데 전화해봤더니 다음 가능한 예약 날짜가 6월이란다. 지금 내 가슴의 수포는 당장 터질 것 같고, 아직 12월, 아직 새해는 시작도 되질 않았는데.
답답한 마음에 한국에 가는 비행기표도 검색해봤다.
차라리 이럴 거면 한국에 가는 게 낫겠어 하면서.
나는 new year 연휴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병원이 문을 다시 여는 날 아침 곧바로 Mychart 앱을 통해 주치의에게 SOS를 쳤다.
나 가슴에 염증이 엄청 심각해졌어!
이미 내 상태를 알고 있던 주치의는 그날 바로 병원에 오라 해주었고 나는 득달같이 달려갔다.
그리고 드디어 나의 주치의에게 내 가슴을 보여주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주치의도 꽤나 놀란 눈치였고, 바로 근처 대도시에 있는 병원에 레퍼럴을 넣어주었다.
(그러게, 한달 전에 항생제 처방해줬으면 좋았잖아 주치의님아 ㅠㅠ)
진작 보여줄 걸 그랬나. 내 상태가 긴급은 긴급이었던지, 놀랍게도 그날 주치의를 만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레퍼럴 넣어준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당장 오라고!
이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치료인가!!
나는 당장 3시간 뒤에 있을 애들 픽업을 동네 친구에게 부탁하고 바로 도시 병원으로 날아갔다.
사실 그날 농양을 터트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서 의사 만나고 치료 날짜를 잡아 돌아올 줄 알았지.
그런데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법인가 보다.
초음파를 보자마자 의사가 들어오다니,
완전 거대한 놈이 안에 들어있다면서 오늘 터트리잔다.
'네네 아무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발 당장 째주세요!
커다란 바늘로 찌른다고 들었지만, 찔러야 하면 찔러야죠!'
(나는 입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그리고 아주 간단한 시술이 이어졌다.
시술 시간은 5분도 안 되었을 거다.
의사는 통증을 덜기 위해 마취 먼저 한다고 말해주었다.
'물론이지요, 통증을 못 느끼게 해줄 마취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따끔한 주사바늘이 살을 뚫고 들어오고, 곧이어 의사가 매스를 집어들었다.
농양이 커서 바늘로 찌르기만 할 수는 없고 절개를 해야 한다고 했다.
'네, 그래야 한다면 그래야죠. 제발 이 놈을 터트려주기만 해주세요!'
그렇게 1.5cm 정도 피부를 절개한 뒤 의사는 그 안으로 바늘을 넣어 농양을 터트렸고, 가슴을 눌러 농양의 진액이 바깥으로 흘러나오게 했다.
꿀렁 꿀렁
거대한 놈이라더니, 정말 그랬다.
언제까지 나오나 싶게 진액은 끝도없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진액이 다 나온 것 같자, 의사는 간호사에게 후처치를 부탁하고 고생했다는 짧은 말을 남기고 나갔다.
내 긴장을 풀어주며 후처치를 도와주던 간호사 언니가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하더니 잠시 수술방을 나갔다.
그리고 뭔가 주섬주섬 챙겨 넣은 쇼핑백을 들고 왔다.
그리고 이어진 내 생애 가장 공포스러운 이야기!
"그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들릴 거 알아. 무섭기도 할 거고.
하지만 유방농양은 재발이 쉬운 병이야. 농양을 다 제거했지만 이대로 절개를 봉합해 버리면 그 안에 염증이 또 생기는 건 시간 문제야. 그래서 이 경우, 우리는 안의 염증이 충분히 치료될 때까지 상처를 열린 채로 두고 그 안을 드레싱해줘. 그리고 드레싱은 이제부터 환자인 네가 해야해. 이것 때문에 병원에 계속 올 수는 없는 일이니까."
나는 멘붕에 빠져 간호사 말을 들었다.
내 상처는 열려 있고 내가 그 열린 살 사이로 드레싱을 해야 한다니....
겁 많아서 상처 열린 건 제 눈으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나인데...
내가 너무 겁 먹은 표정을 짓자 간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다들 처음에는 너처럼 반응하지만 나중에는 전문가급으로 드레싱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자, 어렵지 않아. 이렇게......"
간호사 언니는 능숙하게 길다란 핀셋으로 드레싱 스틱을 집더니 내 가슴의 상처로 쑥쑥 밀어넣었다.
"자, 이렇게 넣으면 돼. 쉽지? 조금 아플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천천히 조심스럽게 넣어. 일주일 동안 혼자 드레싱 잘 갈고, 안 되는 거 있으면 앱으로 메세지 보내고. 그리고 일주일 후에 병원에 체크하러 와.
나는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겁먹은 눈으로 어버버 하며 간호사가 건넨 쇼핑백을 들고 병원을 나섰다.
쇼핑백 안에는 핀셋과 가위, 드레싱 패드, 반창고 등이 들어있었다.
농양을 제거한 건 정말이지 속시원한 일이었지만 셀프로 드레싱을 바꿔주는 일을 한 달 넘게 해야 한다는 건 겁쟁이 내게 청천벽력처럼 다가왔다.
그날, 나는 혹시라도 남편에게 정신적 트라우마를 안기기라도 할까 화장실 문을 굳게 잠그고 욕실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상처를 덮고 있던 거즈를 열고, 태어나 처음으로 내 열린 살을 뚫어져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래, 별 거 아니야. 간호사 언니는 이걸 직업으로 하잖아, 너도 할 수 있어....라고 되뇌어 보았지만 개뿔... 세뇌는 쉽지 않았다. 나는 후달달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드레싱 교환을 시작했다.
그리고 거울 속 상처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가 울었다가 하며 간호사언니는 1분도 안 걸렸던 작업을 장장 30분 걸려 해냈다.
매일 하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상처 사이로 드레싱을 집어넣는 일은 그리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게다가 실로 꼬매 봉합하지는 않았지만, 열린 상처는 하루가 다르게 치유되고 살이 붙고 있어 절개된 오프닝은 날이 갈수록 작아졌고, 그 사이로 드레싱을 넣는 건 더욱 괴로웠다.
그 드레싱을 자그마치, 장장 5주 동안 했다.
일주일마다 병원에 들러 간호사 언니 만나 점검 받으면서 말이다. (간호사 언니 5분 만나고 코페이 60불 냄...네, 제가 집에서 하는 게 맞습니다. 암요)
이번에 농양 치료를 하며 한국의 의료체계가 얼마나 그립던지.
아 나의 조국, 나의 고향 노래를 부르며 매일 밤 드레싱을 갈았다.
그렇게 나는 낯선 이국 땅에서 또 다른 스킬 하나를 늘렸다.
지금은 절개 부위가 다 아물었지만, 실로 꼬매 봉합하지는 않은 탓에 상처가 꽤 크게 남았다.
-이상 강렬한 기억과 상처를 남긴 미국에서 유방농양 치료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