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리베카 솔닛
"선생님 저는 이렇게 바보 같은데 취업해서 돈 벌고 살 수 있을까요?"
내담자 지우가 세번째 상담에서 힘없는 눈으로 한 말이다. 두번째 상담까지 ' 별로요...저는 괜찮아요...' 만을 반복했었는데 겨우 솔직한 마음을 비친다.
" 너무 답답했겠다. 그런 생각이 언제부터 들었을까?"
"엄마는 늘 저를 답답해 하셨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실수하거나 실패하는 것이 너무 싫었거든요. 그래서 나서는 것도 싫고 ... 저희 엄마는 제가 반장도 하고 뭐든 나서서 하길 바랬는데.. 엄마가 늘 '너는 왜 주장이 없어? 그래서 남들 이기겠어?어휴 답답해..' 이렇게 말하시고.... 저는 남들한테 주장을 못하겠어요. ."
" 실패할까 두렵구나. 실패하면 어떤 일이 생길 것 같아?"
" 일단 엄마가 싫어할 것 같고.... 사람들이 저를 무시할 것 같기도 하고....잘 모르겠어요."
" 어릴 때 어떤 일이 기억나? 엄마가 싫어한 일?"
" 엄만 늘 그래요. 뭔가 내가 뭘 말하려고 하면 엄마는 먼저 결론을 말하고... 저는 천천히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데 좀 머뭇거리면 바로 엄마가 다 처리해버려요."
지우는 어린시절부터 억압적인 엄마밑에서 자라면서 자기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잊은 걸로 보였다. 어떤 의견을 주장하는 일이 긴장되고 무서운 일이 되고 자아 정체성을 만드는 시간이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다 보니 점점 외톨이가 되고 무기력이 심해져서 자기 방에서만 지낸다고 한다.
"선생님 저는 부모님이 다 잘해줘요. 뭐 힘든 일 없어요. 바보같은 제가 문제지."
" 지우야. 너 바보 아니야. 천천히 지우가 남들한테 어려움없이 주장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자기 주장을 잘하는 사람이 되는 일은 자기의 목소리를 가지는 것이다. 자기의 목소리를 가진다는 것은 한 인간으로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자기 주장이 없다면 노예와 다를 바가 없으니까.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잘 선택하고 행하면서 결국 긍정적 자아 개념이 완성되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면서 성숙한 어른이 되어간다. 타고난 성격은 있지만 타고난 자아 정체성은 없다. 여러가지를 겪지 않으면 나의 주장이라는 것도 없는 것이다.
해결책을 찾고 소신을 갖게 되는 것에는 '우여곡절'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우는 실패하고 일어서고 경험하고 주장하는 과정을 엄마의 강한 소신때문에 억압되었다. 그러다보니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논리적 주장에 이론적 근거가 필요하듯 나의 목소리를 내는 근거는 실패를 이겨냈던 경험들이다.
모든 평범한 사람들은 우여곡절이 있다. 우여곡절이 자기 목소리의 근거가 되려면 '의미부여'를 스스로 해야한다. 실패한 경험들이 나를 변화시킨 점, 실패했을 때 내 마음, 실망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는 일 ... 이런 것들을 천천히 생각하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지우는 우여곡절을 통해 성장할 시간과 과정을 부모에 의해 자주 차단당하면서 점점 무기력하고 수동적이 사람이 된 것이다.
" 선생님. 괜히 그때 그랬나봐요. 너무 후회되고 부끄러워요."
지우가 자주 하는 말이다... 괜히 해서 실패를 했다는 자책이다.
" 지우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 뭐든 다 잘했어..."
[일상이 의미가 되는 '우여곡절 진로역량']
나만의 주장을 하고 고유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결국 실패하고 실패해서 내가 할 수 있고 없는 일을 구분하는 것이다. 할 수 있고 없는 일들을 구분하다보면 자신이 생기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힘을 주어 해낼 수 있고 하다보면 힘이 생기고 주장이 생긴다. 진로 정체성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은 학업 역량보다 모든 일상에서 자신만의 서사를 써내려 간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 완벽해야 내 주장을 잘하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겪는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해야한다. 가령 내가 오늘 책을 읽었다는 것은 책을 읽으려고 결심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소설이든 사회학이든 철학이든 어떤 분야가 눈에 들어 왔을 것이고 그것이 나 자신에 대한 위로가 되었듯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이든 뭔가 의미가 반드시 있다.
해리 포터를 쓴 조앤 로링의 말처럼 실패에서 자유로워지는 법은 수 많은 실패를 경험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실패할 시간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어른들의 문화일지 모른다.
훗날 지우가 나와 한 상담이 '우여곡절' 중 하나가 되어 지우가 내는 목소리의 미약한 힘이 되기를 바래본다.
< 사람은 사실 어떤 운명도 타고나지 않는다. 사람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우리는 태어난다. 약간의 선천적 기질을 갖고 태어난다. 그다음에는 사건들과 만남들에 의해서 형성되고 좌절되고 뜨겁게 데고 격려받는다.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이 말은 한 사람을 저지하려고 들거나 그의 성품과 목적을 바꾸려고 드는 힘들이 있음을 뜻하고
운명대로 산다
이말은 그 힘들이 완벽히 성공하지는 못했음을 뜻한다. -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302쪽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