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trl+F, 타대리

불구경보다 더 재밌는 인사 구경

by 폭풍속 부푼돛

#본격 직장·가족 판타지 소설





출근 지하 던전에서 퀘스트를 막 끝낸 영웅처럼, 나 과장은 새벽 출근길부터 이미 지쳐 있었다. 던전에서 갓 나온 그는 마나가 바닥난 마법사이자 피가 모자란 전사 같았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자마자, 그는 조금 떨어진 스타벅스로 곧장 향했다. 출근 전 이른 시간이었지만, 몸속에 커피를 수혈할 수 있음에 마음속으로 무한한 감사를 느끼며 상냥하기 그지없는 직원에게 멤버십 카드를 건넸다.


- 나대리 고객님, 따뜻한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그는 커피 한 모금을 넘겼다. 손끝과 발끝으로 퍼져 나가는 카페인의 짜릿함을 음미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아, 좋다. 바로 이 맛이지.”


“나 과장님, 안녕하세요?”

“어? 타 대리? 언제 왔어?”

“방금 왔습니다. 과장님도 일찍 나오셨네요?”

“월급쟁이가 아침, 저녁이 어디 있어. 일이 좀 있어서 일찍 나왔어.”


- 갖고싶다너의 고객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과장님, 잠깐만요. 저도 커피 가져올게요.”

“응, 그래.”

타 대리는 커피를 들고 와 나 과장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과장님, 근데 닉네임, ‘나대리’는 언제적 나대리에요?”

“그러게. 대리였던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말이야.”

“닉 좀 바꾸세요. 쌈빡한 걸로요.”

“응? 뭘 바꿔. 귀찮게시리.”

“평생 ‘나대리’로 사실 거예요? 과장 되신 지가 언젠데.”

“닉 바꾼다고 현실이 달라지나. 뭐.”

“에이, 그래도 혹시 모르죠. 평생 월급쟁이로만 살 순 없잖아요.”

“그래, 타 대리는 똑똑하고 능력도 좋으니 뭘 해도 잘할 거야.”

“현실이 시궁창이니 닉이라도 거창하게 지어야죠. 요즘 그 있잖아요, 부캐. 혹시 모르죠, 부캐가 본캐보다 레벨이 더 높아질지.”

“후훗, 부캐? 본캐? 근데 난 본캐가 있긴 한 거야?”

“과장님 본캐 있죠. ‘나 과장’ 그 자체가 본캐 아닐까요? 성실하고, 열심히 하고, 군소리 없이 말 잘 듣는 캐릭터. 우리 회사에서도 유명하시잖아요.”

“아, 내가 그런 캐릭터였나?”

“앗, 과장님 제가 너무 나간 거 같네요. 죄송합니다.”

“아, 아니야. 맞는 말이지. 나도 다 알고 있는데 뭘...”

“아니에요. 사실 제가 이렇게 말한 데는 또 이유가 있어요. 오늘 승진 발표 날이잖아요.”

타 대리는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이 과장님이 ‘과장’으로 보내는 마지막 날일 겁니다. 차장 승진 대상 1순위가 과장님인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까요. 제 레이더에도 딱 포착됐어요.”

“말이라도 고맙다. 타 대리. 그런데 이렇게 기대했다가 안 되면 타격이 너무 크거든… 넌 모를 거야, 이 마음.”

“그래도 이번엔 되실 겁니다. 진짜 이젠 될 때가 됐잖아요. 내일은 분명 ‘나 차장님’이 되실 거예요.”

오랜만의 아침 커피 동행을 마친 두 사람은, 다시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는 회사 던전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쾌한 아침이다. 상쾌한 아침이다.’

나 과장은 되뇌었다. 자기 최면처럼 활기찬 척, 밝은 척, 억지로 입꼬리를 치켜세우며 표정을 정비했다.

드디어 환한 미소가 완성됐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응, 나 과장, 타 대리. 좋은 아침. 오늘 열 시지?”

“아, 네. 팀장님.”

“이번엔 될 거야. 내가 본부장님께도 얘기했으니까. 아, 그리고 어제는 내가 미안했어.”

“아니에요. 팀장님. 뭐 그 정도 가지고.”

‘역시 팀장은 나쁜 사람만은 아니다. 이렇게 직접 사과도 하고. 팀장이 이러기 쉽지 않거든. 떨쳐버리자. 이번에는 느낌이 좋다. 파이팅 하자, 나 과장… 아니, 나 차장!’

나 과장은 텐션을 다시 올렸다. 10시에 올라올 인사 명령을 기다리기보다 업무에 몰두하려 애썼다. 하지만 짬이 날 때마다 회사 포털 공지사항을 새로고침했다.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지만 손가락은 키보드의 F5 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무실 공기가 두둥실 떠오를 듯 팽팽했다. 오늘은 승진 대상자에게는 손에 땀을 쥐는 시간, 대상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불구경 다음으로 흥미로운 인사구경의 날이다.


시계가 정확히 오전 10시를 가리켰다. 모두 자리에 앉으며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사무실을 감쌌다.

“왜 안 올라와…”

어디선가 소심한 투덜거림이 흘러나왔다. 10시를 넘겨 5분이 지났지만 발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나 과장은 F5를 멈췄다. 익숙한 상황일 법도 했지만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리고 손은 떨렸다.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연될수록 불길한 예감이 커졌다.

결국 그는 회사 포털을 닫고, 멍하니 포털 사이트 첫 화면만 바라봤다. 바로 그때, 사무실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터졌다. 탄성, 웃음, 놀람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나 과장은 귀를 막았다. 초점 잃은 눈동자. 누구 하나 그를 보거나 말을 건네지 않았다.



“어이, 타 대리 축하해! 이게 웬일이래? 하하!”

“팀장님... 그러게요...? 뭐, 어쨌든 감사합니다.”

“타 대리님~ 아니, 타과장님! 축하드려요.”

눈치를 보던 직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타 대리? 타 대리가 승진했다고?’

나 과장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승진 누락보다 타 대리의 승진을 확인해야 했다. 그는 허겁지겁 회사 포털에 접속해 붙임 파일을 열었다. Ctrl+F 창에 이름을 입력했다.


타 대리. Enter.

- 타 대리 ○○○, 과장에 명함.

나 과장. Enter.

- 찾고 있는 것과 일치한 항목이 없습니다.


나 과장은 차마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 위에 털썩 앉았다.

‘뭐지? 왜? 타 대리는 승진 대상자도 아니었는데. 도대체 왜? 한참 어린놈이 왜 나랑 같은 과장이 된 거야? 내가 이러고도 여기 남아 있어야 돼?

생각하면 할수록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고, 사무실로 돌아갈 용기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윗놈이나 아랫놈이나 다 똑같은 놈들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는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화장실을 나섰다. 사무실 양개도어 앞에 서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데, 안쪽에서 팀장이 그를 불러 세웠다.

“어이, 나 과장. 이리 와봐. 도대체 지금 어디 있었어? 본부장님이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오늘 같은 날 이런 얘기해서 미안한데, 그래도 얘기할 건 해야지. 어제 얘기한 보고서 있지? 이게 최선이야? 이 정도밖에 안 돼? 내가 얘기한 게 전혀 반영이 안 됐잖아. 이거 내일 이 시간까지 싹 고쳐서 기안 다시 올리라고 하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평소 같았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겠지만, 지금의 나 과장에게 팀장의 말은 소음에 불과했다.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타 대리의 과장 승진.’


‘열 살도 넘게 어린놈이 나와 같은 직급이라니.’


“팀장님, 죄송합니다.”

“나 과장! 무슨 소리야?”

“오늘은 더 이상 안 되겠네요. 죄송합니다.”

그는 호기롭게 한마디를 남기고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팀장의 호통 때문만도, 자신의 차장 승진 누락 때문만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타 대리의 ‘과장 승진’이라는 사실이, 그의 발걸음을 현관 밖으로 떠밀어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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