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 자기는 내가 최고야.
#본격 직장·가족 판타지 소설
쿵, 쿵… 쿵, 쿵, 쿵…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빠! 아빠? 거기 있어?”
“우리야, 왜 벌써 일어나? 아빠한테 인사 안 해도 돼.”
아이는 변명하듯 말했다.
“아니, 쉬 마렵고 목말라서 일어난 거야. 아빠 때문에 그런 거 절대 아냐.”
그는 딸이 기특해 웃음이 절로 났다.
“우리야, 더 자야지. 이따 학교 가야 하잖아.”
“알았어, 아빠.”
아이는 욕실로 들어와 아빠를 꼭 껴안았다. 작은 가슴의 몽글한 온기가 전해졌다. 우리 딸 벌써 다 컸구나… 우리는 아빠의 손등에 뽀뽀를 남기고 화장실 문을 닫으며 속삭였다.
“아빠 사랑해.”
“아빠도 우리 사랑해.”
나 과장은 종종 딸 얼굴을 못 보고 퇴근하곤 했다. 야근을 하고 늦게 들어온 날이면 늘 그랬다. 그럴 때면 새벽에 깨어난 딸이 먼저 달려와 안아주고 사랑한다 말해 주었다. 그런 딸이 있었기에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딸이 커버리면 가정에서 자신의 존재가 0으로 수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쳤다.
욕실 안 거울 앞에 섰다. 퉁퉁 부어오르고 늘어진 피부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부하가 치밀어 올랐다.
"하, 지겹다. 지겨워. 정말 거지 같은 인생이다..."
집에 온 지 몇 시간도 채 되지도 않은 거 같은데 집을 나서기 위해 세면대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세상이 무너졌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천근만근의 칫솔을 기어코 들어 올려 입안 속에 군내를 민트향으로 바꾼다. 민트향이 잠을 깨우지만 나 과장은 굳이 잠에서 영원히 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음과 정신은 지구 밑바닥에 가라앉아있지만 그의 손과 발은 여전히 성실히 움직였다.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입었다. 지랄 맞는 출근의 루틴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관성은 우리 아빠의 루틴을 더욱 견고하게 다졌다. 천성이 게을러터진 인간이 하루아침에 근면 성실한 인간으로 개조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성실한 나 과장은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사람이었다.
현관을 빠져나왔다. 날카로운 그믐달은 서쪽 산 너머 빼꼼히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쩌저적 쩌어어억
아빠라는 가면을 벗었다. 그믐달의 눈초리가 마음에 걸렸다. 그토록 애정하는 아빠 가면을 서쪽 산 뒤쪽으로 넘기고 싶지 않았다.
6시 59분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는 집에서 6시 35분 전에는 출발해야 했다. 다음 지하철도 있었지만 그는 용납하지 않았다. 7시를 기준으로 전과 후는 천지 차이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출근시간만큼은 1분 1초도 양보할 수 없는 계획적인 나 과장이었기에 6시 59분 출발 지하철을 꼭 타야만 했다.
6시 57분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으로 가기 전 역 천장 모니터가 열차 운행 정보를 알려준다.
"도착하기 2분 전"
2이라는 숫자가 나 과장의 마음을 요동쳤다. 2분이면 슬슬 걸어 내려가다 보면 열차를 놓칠 거라는 것은 경험으로 터득한 바였다. 그건 나과장만의 생각은 아니었으리라. 옆 사람이 먼저 스타트를 끊었다. 그의 뒤에서도 타닥타닥 누군가 달려왔다. 이번 열차는 무조건 타리라는 마음은 변함없다. 동시에 나 과장의 발걸음도 빨라진다. 빨라진 발걸음은 어느새 달리기로 변해있다. 새벽 6시 57분 느닷없는 지하철역 달리기가 한창이었다.
새벽 달리기의 정점은 환승역에서 그 꽃망울을 터뜨렸다. 환승 열차를 놓치지 않기 위한 경쟁이 열차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출입문은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으로 바뀌었다. 달리기 선수들은 수년간의 체득한 경험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결승점까지 전력질주를 하면 기다리지 않고 환승을 할 수 있다는 굳은 다짐이었다. 어린 시절 운동회에서 100미터 달리기에서나 느낀 비장함이 되살아났다. 출발을 알리는 총성 대신 자동문이 양쪽으로 열린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를 모았을까. 남녀노소 가릴 것이 없다. 나 과장도 그 무리 맨 앞에서 서 있었다.
‘나도 질 수없지!’
계단 2칸, 3칸을 한꺼번에 내려간다.
'그래 아직 죽지 않았어.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1등으로 열차를 탈 수 있으니까! 흐흐흐~'
자만심도 한순간, 환승 열차에서 나온 누군가가 나 과장을 향해 달려온다. 목적지는 다르지만 목적은 같은 서로의 전력질주였다.
"어어어어~ 어어어!"
퍽!!
나 과장의 어깨와 상대방의 어깨가 크게 부딪혔다. 달리기의 관성을 줄이지 못하고 상대방과 거의 앉다시피 엉켜버리며 넘어졌다.
“어머, 아저씨 뭐 하는 짓이에요!”
여자의 날 선 목소리에 그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억울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 아뇨…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여자는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침부터 뭐가 그렇게 바빠요? 사람을 밀고, 넘어지면서 남의 몸에 손은 또 왜 대요?”
그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저… 저기,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더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주변 시선이 전부 자신을 향한 비난처럼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열차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정말 내가 잘못한 걸까? 아니,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내가 잘못했겠지.’
그러나 곧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들 각자의 출근길에 매달려 있을 뿐. 그는 다시 생존의 자세를 잡았다. 무릎을 살짝 굽히고 반동에 몸을 맡기는 법. 수많은 출퇴근 끝에 체득한 생존 방식이었다. 옆 사람도 휩쓸려 몸이 기대 오자, 그는 자연스럽게 지탱해 주었다.
"아이코, 죄송합니다."
옆 사람이 속삭이듯 말했지만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관성에 저항하지 말고 그저 몸을 맡기는 게 핵심이라도 되는 듯, 말 대신 몸으로 보여주었다. 이제 다음 환승역까지 별다른 가속과 감속이 없기에 나 과장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시 진정시켰다. 신체 접촉을 줄이기 위해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출근 시간에는 웬만해서는 앉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터라 굳이 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지하철의 관성에 그의 몸을 맡겼다.
나 과장은 두 눈을 지그시 감는다. 오늘 하루 고생한 자신에게 내리는 짧은 보상이었다. 차창에 비친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모두 같은 얼굴, 같은 표정. 미간의 주름은 펴지지 못한 채, 다들 눈을 감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할 테지, 그리고 스스로 위안하고 있겠지.
‘그래도 서서 자기는 내가 최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