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십자성

하고 싶은 일 vs 해야만 할 일

by 폭풍속 부푼돛

#본격 직장·가족 판타지 소설




‘진짜… 나가라는 건가?’

머릿속에 언뜻 스친 단어는 ‘권고사직’이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승진 몇 번 누락됐다고 설마… 내가 너무 예민한 거겠지. 다들 힘들게 살아가잖아. 괜히 유별나게 굴지 말고 그냥 버텨야 돼. 이 회사를 어떻게 들어왔는데. 번듯한 이 회사 덕분에 아내도 만나고 가정도 꾸렸잖아. 취업했을 때 기뻐하던 부모님 얼굴, 친구들의 부러운 눈빛… 그걸 잊으면 안 되지. 버텨야 돼. 여기서 무너지면 정말 끝이야.’

실직한 가장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스쳤다.

‘이 나이에 잘린다고 생각해 봐. 사람들 눈에는 얼마나 한심하게 보이겠어. 대출금은? 학원비는? 생활비는? 다 누가 책임지지?’

그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죽어라 고생하면 기회가 또 올 거야. 분명 다음번엔 승진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회사가 곧 나고 내가 곧 회사다. 아자아자, 파이팅이다.’

카페인의 힘 때문이었을까. 오전까지만 해도 전쟁터에서 패배자로 쓰러져 있던 그는, 어느새 햇살 아래 의기충천한 전사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오후의 따스한 햇살 속에서 나 과장이 몸 둘 자리는 도무지 마땅치 않았다.

‘다시 회사로 들어갈까?’

팀장에게 직접 말하지 못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지만, 다시 들어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오히려 더 우습게 보일지도 몰랐다.

‘주위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냥 집으로 가자.’

터벅터벅 발걸음은 집을 향했지만, 눈빛은 이미 초점을 잃고 있었다. 마치 난파선의 갑판 아래에서 방향 없이 노를 젓는 노꾼 같았다. 아니, 노를 놓아버린 노꾼의 뒷모습에 가까웠다. 어디론가 가고는 있지만, 목적도 없이 떠밀려가는, 그저 흘러가는 길 위의 뒷모습이었다.



“오늘 늦게 온다더니, 웬일이야?”
“오늘 일찍 끝나서… 그냥 왔어.”
“밥은?”
“먹어야지.”
“아니, 밥은 좀 안쳐놨냐고?”
“아니, 방금 왔는데.”
“일찍 오면 뭐 해? 밥이라도 좀 하지. 늦게 온다고 해서 준비 안 했는데 뭐해서 먹어. 에휴.”


- 오늘 승진에서 누락됐어.

입술이 달싹였지만, 그는 결국 삼켰다. 차마 아내 앞에서는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이번 달 또 마이너스인 거 알지? 왜 이렇게 내라는 건 많고 들어오는 건 없냐. 대출금 이자는 계속 오르고, 다음 달엔 당신 아버지 생신도 있어서 목돈 들어가야 돼. 긴축 재정이야. 당신도 야근 좀 더 해서라도 돈 좀 마련해 봐. 아, 그리고 우리 수학학원 하나 더 등록했어. 옆집 우리 친구는 과외까지 한다더라. 아휴, 정말 지긋지긋하다.”

나 과장은 휴대폰을 켜 마이너스 통장을 확인했다. 단 1원도 남지 않은 잔고.
'이 마이너스 표시 하나만 없어도 숨통이 트일 텐데…'

“휴대폰 보지 말고 쓰레기나 버리고 와.”
“응…”

재활용 쓰레기를 카트에 싣고, 종량제 봉투와 음식물 쓰레기를 두 손에 들고 현관을 나섰다. 한 번에 처리하려는 욕심에 카트는 잔뜩 불룩했다. 엘리베이터를 내려 경계석 앞에 다다랐을 때, 카트가 갑자기 기울며 쓰레기가 우르르 쏟아졌다.

“어어, 아이 젠장…”

나 과장은 순간 괜히 아내 탓으로 화살을 돌렸다.
'미리미리 좀 버리지… 이렇게 쌓아두니까 이 모양이지.'

허리를 굽혀 흩어진 쓰레기를 하나하나 주워 담았다. 잡다한 플라스틱, 찌그러진 캔, 구겨진 종이 사이에서 낡은 스케치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어릴 적 그린 그림이었다. 지구본 위, 남십자성 아래에 서 있는 세 가족. 삐뚤빼뚤한 ‘세계여행’이라는 글씨. 그리고 유독 크게 그려 넣은 아빠의 모습.

'그래, 어릴 땐 아빠를 유난히 좋아했지. 목욕할 때도, 잠잘 때도 아빠 없으면 울고불고했는데…'

나 과장은 스케치북을 펼쳐 그림을 바라보다, 종이를 조심스레 접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딱지처럼 단단해진 종이 조각을 휴대폰 케이스 속에 넣었다. 마치 부적처럼, 딸의 그림을 간직하고 싶었다.



재활용 보관소는 이미 가장들로 북적였다.
'이 시간에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팔자 좋은 사람들 참 많구나. 이 사람들은 다 아내가 벌어다 주나? 부럽네, 부러워.'

특히 음식물 처리함 옆에는 몇몇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재활용 보관소 한쪽 벽에 붙은 ‘금연’ 간판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자리가 바로 그곳이었다. 그마저도 혹시라도 피해를 끼칠까 안절부절못하는 듯, 담배연기는 허공으로만 꾸역꾸역 내뿜어졌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연기가 허공에 부유하며 메아리처럼 퍼졌다.

'담배라는 게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저렇게 꾸역꾸역 피워대니. 아니, 오히려 저렇게까지 못 끊는 사람들이 더 대단한 건가? 무엇이 이 가장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회사 밖 자전거 보관소에서, 또 음식물 처리함 옆에서, 허공에다 한숨처럼 연기를 내뿜는 걸까.'

나 과장도 저도 모르게 코끝을 벌름이며 담배 연기를 킁킁거리며 음미하고 있었다.



“아빠!”

주변에 있던 비슷한 차림의 가장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나 과장 역시 소리에 반응했다. 우리였다. 그는 카트를 질질 끌며 곧장 달려갔다. 마치 패배자들 사이에서 혼자 승진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처럼, 선택받은 자의 발걸음이었다.

“우리야! 웬일이야? 학원은 안 갔어?”
“아빠야말로? 지금 회사에 있을 시간 아니야? 아, 배고파 죽겠어. 뭐 맛있는 거 좀 사줘.”
“엄마가 밥 하고 있는데 집에 가서 먹어야지.”
“싫어. 나 점심도 못 먹었단 말이야.”
“뭐? 왜 점심을 안 먹었어? 어디 아파?”
“응, 학교에서 몸이 안 좋아서 보건실에 누워 있었어.”

결국 둘은 발길을 돌려 맥도날드로 향했다. 카트 바퀴가 바닥을 긁으며 내는 소리마저도 경쾌하게 들렸다.



“여기 빅맥 세트랑 해피밀 세트 하나…”
“아빠, 나 해피밀 세트는 이제 안 먹어. 그냥 빅맥 세트 주세요.”

나 과장은 피식 웃음이 났다.
“언제 이렇게 컸냐. 해피밀 장난감 때문에 졸라대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게 언제 적 얘기야. 아빠랑 햄버거 먹는 것도 진짜 오랜만이다.”

둘은 자리에 앉아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나 과장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케이스를 벗겼다. 안에는 꼬깃꼬깃 접힌 종이가 들어 있었다.

“우리야, 이거 봐. 네가 어릴 때 그린 거야.”

“뭐야, 이게 아직 있었어? 아빠, 그냥 버려.”
“이걸 어떻게 버리냐. 우리 딸이 정성껏 그린 건데.”

우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빠, '까르페디엠' 몰라? 지금에 충실하라고 했던 게 아빠잖아. 언제 적 걸 들고 와서 그렇게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거야?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야. 지금, 여기 있는 나만 있다고요.”

나 과장은 순간 당황했지만, 애써 담담히 대답했다.
“지금의 네가 있기까지 과거의 네가 있었던 거야. 아빠가 말한 ‘지금에 충실하라’는 건 과거를 부정하라는 뜻은 아니었어.”

우리는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빠, 아빠는 지금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어? 지금 아빠의 모습이 그래 보여? 난 아닌 거 같아. 솔직히 지금의 아빠가 아쉽긴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아빠가 그립지는 않아.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난 지금에만 충실할 뿐이야. 과거의 아빠가 그렇게 가르쳤잖아.”

우리는 종이를 가리켰다.
“이 그림 기억나요? 아빠, 그때 아빠의 꿈이 뭐였는지 기억해? 항상 세계여행 가자고 했지. 남십자성을 보러 떠나자고 했지. 자유를 찾아 탐험하자고 했지. 그래서 내가 이런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 거잖아. 근데 아빠는 결국 말뿐이었어.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다가… 지금은 그 말조차도 없어졌잖아.”

나 과장은 깊은숨을 들이켰다.
“우리야, 아빠는 항상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에서 고민을 해. 그리고 나름의 답을 찾았지.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을 선택하는 걸로. 아빠는 한 가정의 가장이고, 이 가정이 잘 유지되도록, 식구들이 위험하지 않도록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그 의무를 지키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그래서 해야 할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 아빠가 그걸 소홀히 할 때가 제일 불안하고 불행해. 그래서 아빠는 해야 할 일을 택한 거야. 아까 자유 얘기했지? 아빠도 여전히 자유를 추구해. 아빠는 해야 할 일에 집중할 때 비로소 자유를 느낄 수 있거든.”

“그럼, 혼자 그 자유나 만끽하세요. 그럴 거면 왜 결혼하고 나까지 낳았는데?”
“우리야, 말하는 게 왜 그래?”
“아니, 됐어. 아빠, 내가 잘못했어. 말버릇 없이 해서 미안해. 더 이상 아빠랑 논쟁하고 싶지 않아. 그냥 햄버거나 빨리 먹고 가자.”

나 과장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붙어버렸다. 맥도날드의 바닥에서 신발이 쩍 하고 떨어졌지만, 나 과장과 우리의 입술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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