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달

가면의 쓸모

by 폭풍속 부푼돛

#본격 직장·가족 판타지 소설




“아니, 쓰레기 버리다 말고 어딜 갔다 온 거야? 응? 우리도 같이 있었던 거야?”
“응, 여기 앞에서 만나서 같이 밥 먹고 왔어.”
“밥을 먹고 오면 전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집에 있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해? 어쩜 그렇게 다들 이기적이야?”

우리는 신발을 벗으며 짧게 쏘아붙였다.
“이렇게 엄마 잔소리 듣기 싫어서 밖에서 밥 먹고 온 거지. 나 방에서 숙제할 거니까 들어오지 마.”

쾅하는 소리와 방문이 닫혔다.

“딸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는 게 말하는 싸가지 좀 봐라. 아, 그러고 보니 너 학원은 왜 안 갔어? 한 달에 들어가는 돈이 얼만데. 당장 안 나와?”

잠시 뒤, 방 너머로 우리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 진짜 지긋지긋하다! 아아악!”
“쟤가 뭐라고 하는 거야? 당장 안 나와?”

옆에서 나 과장은 낮게 중얼거렸다.
“오늘 아파서 하루 종일 보건실에 있었다잖아.”
“아니 그래도 할 건 해야 할 거 아냐. 그렇게 맨날 감싸니까 저 모양이지. 야, 너 어서 안 나와!”


나 과장은 조심스럽게 주방으로 들어갔다. 싱크대 안은 깨끗했다. 평소 같으면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기름 묻은 그릇들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괜히 수도꼭지 물을 틀었다가 잠갔다. 물 흐르는 소리가 적막한 집안에 울렸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 과장은 무선 청소기를 찾았다. 집 안에서 자신의 ‘쓸모’를 찾기 위해서였다.

- 위이이잉

“뭐 하는 거야? 저녁시간에 청소기는 왜 돌려? 시끄러워 죽겠네, 당장 꺼!”

괜한 조퇴를 하고, 딸과 함께한 외식이 오히려 독이 됐다. 오늘, 집에서의 나 과장의 쓸모는 결국 제로였다. 남편으로서의 존재감이 한 꺼풀, 또 한 꺼풀 벗겨지고 나니 남은 건 맨얼굴뿐이었다. 맨얼굴의 모습은 공허함이었다. 그 공허함은 가정 안에서 한 점으로 수렴되듯 쪼그라들었다. 더 나아가, 이 집 어디에도 있어서는 안 될 듯한 ‘무존재’였다. 그 무존재의 감각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나 과장은 현관문을 열고, 집 근처 스타벅스로 향했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스타벅스는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했다. 카운터에서는 바리스타의 경쾌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주문을 불렀고, 창가에 앉은 학생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문제집을 넘겼다. 구석자리의 직장인은 노트북 화면을 두드리며 화상회의에 몰두했고, 어떤 연인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그 북적임 속에서도 누구 하나 타인의 기척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모두가 자기만의 우주에 잠겨, 자기만의 속도로 살아내고 있었다.

나 과장도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팔걸이가 달린, 쿠션감 좋은 의자를 찾아 앉았다. 따뜻한 커피잔을 손에 쥐었지만, 그 온기는 손끝에서조차 오래 머물지 않았다. 휴대폰을 꺼내 넷플릭스를 켜는 순간,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던 공허함을 화면 속 장면들에 끼워 넣었다. 마치 잃어버렸던 조각을 찾은 반쪽이가 하나의 동그라미를 완성한듯한 완벽한 안정감을 느꼈다.

‘이 것도 잠시뿐이겠지. 화면이 꺼지고 불이 꺼지면, 다시 나는 없는 사람이 될 거야. 단지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내가 누군가라는 착각 속에 머물고 싶다.’

문득 옆자리에 앉은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나 과장에게는 유리벽 너머의 메아리처럼 멀게만 들렸다. 세상은 저렇게나 가볍고 환하게 돌아가는데, 자신은 혼자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는 듯했다.


'0401'

낯익은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른다. 그런데 오늘따라 괜히 낯설다. 이 숫자는 우리가 거짓말같이 마법처럼 만난 날. 첫 만남을 기념하며 만든 숫자 암호였다. 마치 흑백영화처럼 아련하게만 느껴지는 그런 날이었다. 지금은 낯설고 차갑게 울리는 도어록의 전자음이 오늘따라 더욱 날카롭게 파고든다. 전자음과 동시에 현관문이 열리고, 나 과장은 혹여나 가족들이 깰까 싶어 조심스레 거실 바닥에 발바닥을 내디딘다. 이 순간 그의 발은 고양이 발의 젤리처럼 부드럽고 조심스럽다. 마치 세상 누구도 깨어 있지 않은 이른 새벽, 가느다란 그믐달이 걸려 있는 풍경 같다.

욕실의 수도꼭지를 틀자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린다. 다행히 아내는 깊은 잠에 빠져 있어, 오래 물을 쓴다고 잔소리하는 사람은 없다. 욕실이라는 이 작은 공간은 그에게 주어진 드문 독립국, 오롯한 자신만의 시간이었다. 나 과장은 하염없이 뜨거운 물을 어깨 위로 흘려보낸다. 마치 누군가가 ‘괜찮다’며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듯, 뜨거운 물만이 그의 무거운 어깨를 잠시나마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차!'

갑자기 나 과장의 모든 신경이 살아나고 머릿속의 뉴런들이 번쩍 연결된다. 집에서 잠시 숨겨져 있던 나 과장이라는 가면이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얼굴을 잠식했다.

‘맞다, 오늘 아침 팀장이 보고서를 내일까지 제출하라고 했지… 젠장, 까맣게 잊고 있었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 주던 뜨거운 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를 달래주지 못했다. 아쉽지만, 물줄기도 여기까지였다. 나 과장은 급히 어깨 위의 물기를 수건으로 훔쳤다.

‘아, 진짜 까먹고 있었네. 이거 어떡하지? 냉정하게 생각하자. 어차피 집에서는 보고서를 완성할 수도, 제대로 쓸 수도 없어. 그래,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내일 새벽에 일어나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회사에서 해보는 수밖에.’

그는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어두운 안방을 더듬어 침대를 찾아 그믐달처럼 아내 옆에 누웠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천장은 어느새 보고서 기안문의 하얀 바탕 화면으로 변해 있었다. 떠다니는 단어와 문장들이 이리저리 얽혀 어지럽게 흩날리듯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아, 젠장. 잠이 안 오네.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내일 뭐라도 할 텐데…’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으면서, 동시에 이것도 저것도 해야 하는 현실. 그 어떤 것도 자유롭지 못하고, 모든 것에 종속되어 있는 상황. 나 과장은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발로 걷어찼다. 그믐달이 뜨기를 바랄 뿐이었다. 새벽인지 늦은 밤인지 모를 어둠의 한가운데였다. 그는 옷을 챙겨 입고 가방을 메고, 대중교통 앱을 열어 지하철 첫차 시간을 확인했다.

‘하아… 아직 30분이나 남았네.’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검푸른 새벽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머릿속은 오로지 회사에서 해야 할 일들과 불안감이었다.

‘에휴, 여기 앉아 있어 봤자 뭐 하냐. 그냥 나가자.’

현관문을 열고, 1층 자동문이 밀려 나가듯 열렸다. 바깥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북두칠성이 눈에 들어왔다. 일곱 개의 별 중, 늘 흐릿하게만 보이던 국자와 손잡이 사이의 작은 별마저 오늘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우리랑 같이 보면 좋을 텐데.’


그 순간, 오른편 먼 산 너머에서 낯선 무언가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차갑고 날카로운 무언가다.

- 끼이이이익

귀를 찢는 금속성의 예리한 소리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아아악! 뭐야, 이게 뭐야! 아아아!”

나 과장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몸서리쳤다. 쇳소리는 그의 귀를 베어 간다.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채, 그저 소름 돋은 두 손으로 귀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쇳소리는 멎었다. 소름은 가라앉고, 두 손도 천천히 귀에서 내려왔다.


어느새 그믐달은 산을 긁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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