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의 시작
#본격 직장·가족 판타지 소설
사무실로 향하는 길,
'커피 한 잔이면 딱이겠다. 어제는 거의 한숨도 못 잤잖아. 아, 커피가 필요해.'
첫차의 여유를 누릴 겨를도 없었다. 바닥난 체력과 정신력을 회복해 줄 물약이 필요했다. 지하철에서 거의 뛰듯 걸어 나와 보폭을 넓히고, 계단은 두 칸씩 성큼성큼 올랐다. 지상에 스며드는 새벽바람 따위는 상관없었다. 지금은 오직 카페인이 온몸을 적셔 주는 순간만이 절실했다.
저기 멀리 익숙한 스타벅스 간판이 보였다.
"하~ 커피다…"
그러나 불빛은 꺼져 있었다.
“뭐야? 간판이 꺼져 있네? 젠장.”
이전에는 한 번도 문을 닫은 적이 없었는데.
시간을 보니, 스타벅스의 오픈 시간인 7시 이 전이었다. 보고서를 써야 하는 마음에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때, 바로 옆에서 노란 간판이 불을 밝혔다.
- 이모션 커피
'저번에 타 대리와 함께 보았던 그곳이다. 스벅 옆에서 버티려면 이 정도 전략은 필요하겠지. 근데 수요가 있을까? 나 같은 사람이 없으라는 법도 없지.'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동쪽 하늘에 여명이 걸쳐 있었다. 짙푸른 새벽빛 아래에서 노란 간판은 더욱 선명했다. 그곳은 마치 해 없는 검푸른 하늘 속에서, 그 시간에만 빛을 내는 별 같았다. 어두운 바다에서 보물을 찾는 모험가를 이끄는 작은 별처럼.
나 과장은 그 노란빛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문이 열리자, 문짝에 매달린 작은 종소리가 먼저 울렸다. 동시에 커피 향이 나 과장의 코끝을 스치며 폐 깊숙이 스며들어 모세혈관을 타고 퍼져나갔다. 그것은 마치 니코틴이나 알코올이 입을 거쳐 장기를 지나 몸 구석구석 말단까지 번져 가는 짜릿한 쾌감과도 같았다.
이곳의 향은 평범한 카페에서 풍기는 커피 향과는 달랐다. 묘한 향신료가 더해진, 이국적인 향. 나 과장은 문득, 커피가 처음 만들어지던 시절 이슬람의 어느 시장에서 맡았을 법한 향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 확신을 더해 준 것은 다름 아닌 그 종소리였다. 그것은 나 과장이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특별한 울림이었다. 종에서 퍼져 나온 진동은 단순히 고막을 울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새로운 고막을 만들어 내듯, 내면을 직접 두드리며 울려 퍼지는 특별한 공명.
그 순간, 나 과장은 여기와 지금을 넘어, 지구 어딘가 낯선 땅에서 우연히 커피를 처음 발견한 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언뜻 듣기에는 남자의 목소리인지 여자의 목소리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변성기가 오기 전 소년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그인지 그녀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바 테이블 너머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순간 나 과장은 와인바나 칵테일바를 떠올렸다.
샛노랗게 칠해진 바 테이블 정면에는 짙은 곤색의 글씨로 이모션 커피라는 글씨가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작은 필기체로 핸드드립 커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글자의 푸름은 마치 새벽 여명이 떠오르기 전, 하늘에 남아 있는 깊은 푸른빛과 같았다.
바 테이블 옆 유리 칸막이 너머에는 거대한 로스팅 기계가 있었다. 마치 18세기 영국 산업혁명 시절에 만들어졌을 법한 빈티지한 장치였다. 바 뒤쪽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진열장에는 각종 핸드드립 도구들이 놓여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이곳이 여느 카페와는 다른, 원두 로스팅 전문점임을 보여 주었다.
진열장 한편에는 밀폐된 유리병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 안에는 색색의 액체 같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묘하고도 강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엇이든 태워 버릴 듯한 붉은색, 이 세상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한 푸른색, 또는 이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새까만 검은색. 색들은 각기 다른 농도를 띠고 있어 마치 서로 흘러가고 섞이는 듯 보였다. 짙푸른 심연이 옅은 하늘빛으로 스며들고, 굳게 닫힌 검정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새 하양으로 번져 갔다.
그 모든 색색의 유리병과 기구들, 그리고 공간을 가득 채운 분위기까지. 나 과장은 그것만으로 충분히 압도되었다. 도시, 평일 새벽 여섯 시. 출근길의 한복판에서 이런 경험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비현실적인 감각으로 몰아넣었다.
“저희 가게 첫 손님이시네요.”
“아, 네.”
“어떤 커피로 드시겠어요?”
“어… 여기 메뉴판은 없나요?”
“앗, 죄송해요. 아직 메뉴판을 달지 못했거든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 과장의 가슴속에는 묘한 감정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남자들이 흔히 좋아할 법한 육감적인 실루엣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춘기 소년 같은 평범한 뒷모습뿐이었다. 그럼에도 나 과장은 눈길을 거두기 어려웠다. 메뉴판을 들고 휙 돌아서는 순간에야,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손님.”
“아, 네.”
바 테이블 위로 놓인 메뉴판을 뚫어지게 보았지만, 낯익은 아메리카노는 어디에도 없었다. 모두 생소한 이름의 커피들뿐. 혹시나 싶어 메뉴판 뒤쪽을 뒤적여 보았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혹시 원하시는 메뉴가 있으실까요?”
“아, 혹시 그냥 아메리카노는 없나요?”
“당연히 해드릴 수 있죠. 아이스로 드릴까요, 따뜻하게 드릴까요?”
“음… 따뜻하게 해 주세요.”
“가지고 가실 건가요?”
“네.”
늘 ‘얼죽아’를 외치던 나 과장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런 선택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낯설었던 것은, 직원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이었다.
앳되고 뽀얀 피부, 발그스레한 볼, 짧게 커트한 머리에서 풍기는 산뜻함. 단정한 복장, 그리고 가슴 왼편에 반짝이는 작은 명찰.
'41N'
숫자와 알파벳이 섞인 그 조합은 알 수 없는 암호처럼 보였다.
‘41번? 넘버? 단순히 숫자 41을 의미하는 걸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 과장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는 커져가는 감정이 이 카페를 가득 채워 버릴 것만 같았다. 마치 커피 머신에서 쏟아져 나오는 뜨거운 수증기처럼.
‘음… 무슨 의미일까. 분명 뭔가 뜻이 있을 텐데.’
“여기 따뜻한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 순간, 직원이 바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우드 원판처럼 보이는 상판 위에 놓인 것은 순백의 카드. 나 과장의 가슴은 순간 내려앉았다가 곧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숨겨 두었던 마음이 적힌 수줍은 쪽지 같았다.
“저기요, 손님.”
“아? 네?”
“이거요.”
“이게 뭐죠?”
“저희 멤버십 카드예요. 원래는 단골손님들에게만 드리는데, 첫 번째 손님이시라 특별히 드리는 거예요.”
“아… 네.”
“스탬프 열 개를 모으시면 아주 특별한 커피를 드릴 수 있습니다.”
“네. 그런데 카드 품질이 정말 훌륭하네요. 마치 옛날에 마음을 전하던 연애편지지 같달까.”
“저희가 이번에 오픈하면서 많이 신경 썼거든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공을 들인 건 저희의 스페셜 커피예요. 꼭 드셔 보세요.”
나 과장은 멤버십 카드를 테이블 위에서 손바닥 안으로 쓸어 담았다.
“손님, 잠시만요.”
직원이 그의 손목을 살짝 눌러 제지했다. 불시에 닿은 그 감촉, 의도치 않게 가까워진 거리. 나 과장의 심장은 또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손님, 카드에 닉네임을 적어서 주세요. 저희가 보관하고, 오실 때마다 스탬프를 찍어 드리거든요.”
“아… 네.”
나 과장은 빈칸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단순히 종이 한 장일 뿐이었는데, 지금은 마음을 고백하듯 무언가를 새겨야 할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닉네임이라… 뭘 적지? 특별한 걸 쓰고 싶은데….’
그가 망설이는 사이, 직원의 목소리가 낮게 파고들었다.
“손님, 뭘 그렇게 고민하세요? 그냥 채우시면 돼요. 손님이 진짜 원하시는 건 뭐예요?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 무언가 말이에요.”
“네? 내가 원하는 것…?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
나 과장은 문득 숨이 막히는 듯했다. 지금 내 마음을 흔드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아니, 누구인지, 스스로에게조차 답하기 어려웠다.
-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여자친구가 건네준 조그마한 하얀 카드를 들여다보니,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한 문장이 있었다. 삶의 방향과 미래를 고민하던 그는 가만히 앉아 그 질문만을 응시했다.
'내 꿈은 무엇일까?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무엇을 할 때 가장 가슴이 뛰고 설레는가?'
문득, 조금은 엉뚱하게도 한 온라인 게임이 떠올랐다. 꿈을 묻는 질문 앞에서 게임을 떠올린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오프닝 배경과 그 위로 흐르는 음악은 그의 몸을 저절로 반응하게 했다. 이 순간만큼은 이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판단과 계산은 액세서리에 불과했고, 가슴의 두근거림은 그 자체로 진실이었다.
'이게 바로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무언가 아닐까.'
지금은 미래를 준비하는 사회초년생에 불과하지만, 게임 속에서 그는 노련한 뱃사람이었다. 북극성을 바라보며 북해를 가로지를 때, 수면 위로 내리는 바다 눈은 까만 세계 속에 피어나는 포근한 낭만꽃이었다. 남십자성을 따라 남대서양 수평선 너머에서 맞이한 희망봉은 이름 그대로 ‘희망’이었다.
인도양의 거친 폭풍 속에서 돛이 부풀어 오를 때면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이 몸을 관통했다. 발굴해야 할 보물이 그곳에 있기에, 폭풍은 단지 돛을 부풀리고 배를 움직이게 하는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때로는 도사린 함정과 해적들, 때로는 절망스러운 난관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위험이 클수록 발굴할 보물의 가치는 더욱 빛났다. 그럴수록 그의 가슴은 더욱 두근거렸고, 설렘은 한층 선명해졌다. 위험의 크기와 보물의 가치는 비례한다는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진리를, 그는 게임 속에서 배웠다. 그래서 게임 속 수많은 직업 가운데 주저 없이 그것을 선택했다.
그것은 바로,
모험가.
“모험가?”
“응, 모험가. 아빠는 모험가가 되고 싶어”
“보물 찾는 모험가? 나도 그거 되고 싶어.”
“우리도 아빠랑 모험가 될까?”
“응, 나도 아빠랑 보물 찾으러 다니고 싶어.”
우리 아빠는 아이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빠랑 같이 보물을 찾으러 가자. 모험가는 위험과 보물을 동시에 마주하는 사람들이야. 위험이 클수록 더 멋진 보물이 기다리고 있지. 위험과 보물은 하나라고 할까. 전 세계를 누비며 다양한 보물을 찾으러 떠나자.”
"요즘에도 모험가가 있어?"
"그럼! 세상의 보물을 찾아서 모험을 떠나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한다고!"
“모험가들은 어떻게 보물을 찾을까?”
“일단 보물 지도가 있어야겠지. 그리고 저기, 보이는 북극성 말이야. 그걸 기준으로 길을 잡고 모험을 떠났단다.”
“북극성이 어디 있어?”
“저기 북두칠성 국자 모양 보이지? 움푹 들어간 부분 끝에서 조금 더 가면 밝게 빛나는 별, 그게 북극성이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폭풍이 몰아쳐도 북극성은 항상 우리 머리 위에서 밝게 빛나고 있지.”
“아빠, 우리 머리 위에 별이 있으면, 우리 발밑에도 별이 있을까?”
우리 아빠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우리야. 우리 발밑에도 무수히 많은 별들이 환하게 빛나고 있을 거야. 우리가 보는 별들과는 좀 다르겠지만 말이지.”
“신기하다. 아빠 발밑에도 별이 뜬다고?”
“그럼. 지구는 둥글잖아.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의 반대편에도, 우리 같은 아이가 자신의 발밑을 올려다보며 궁금해하고 있을 거야.”
“진짜? 내 발밑에도 하늘이 있고, 무수한 별들이 있다고? 신기하다, 신기해!”
우리 아빠는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어디를 가든 우리 머리 위에는 거대한 우주가 펼쳐져 있고, 우리를 비추어 주는 별들이 있단다. 아마 지구 반대편에는 북극성 대신 남십자성이 떠 있을 거야.”
“남십자성? 아빠, 우리 지구 반대편으로 가자! 남십자성을 찾아서! 남십자성이 비추는 어딘가에는 어마어마한 보물이 있을 거야. 조금 겁이 나긴 하지만 아빠만 내 옆에 있으면 괜찮아. 생각만 해도 설렌다! 아빠, 어서 가자, 어서!”
우리 아빠는 웃으며 아이를 안아 올렸다.
“위험이라는 불안함과 보물이라는 기대감이 포개어져, 설렘이라는 위대하고도 짜릿한 감정을 만들어 내는 거야. 위험이 클수록 보물의 가치는 더욱 빛나는 법. 우리가 혼자서도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 때, 망설이지 말고 떠나자. 우리야,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함께 모험가가 되는 거야.”
“아빠! 여기 스케치북에다가 그리고 있어. 모험가가 되는 꿈 말이야. 잊지 않으려고, 우리가 까먹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여기 크게 적을 거야."
모험가.
“네, 감사합니다. 모험가 고객님. 이 카드는 저희가 보관했다가 오실 때마다 도장을 찍어 드리겠습니다. 다음에 오실 때는 닉네임만 말씀해 주세요. 여기 아메리카노 나왔고요, 카드에도 도장 찍어 두었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바 테이블 위에 아메리카노 한 잔이 놓였다. 나 과장은 아무렇지 않게 테이크아웃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소량의 액체가 입속으로 스며들어 식도를 타고 위로 내려갔다. 위에서 흡수된 카페인은 혈액을 따라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손끝과 발끝, 머릿속 뇌의 모세혈관까지. 나 과장은 그 모든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시원하다.”
카페인이 마치 막힌 혈관을 시원하게 뚫어 주는 듯했다. 구석구석 쌓여 있던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 내리는 기분. 그러나 그 순간, 내 뇌리에 불쑥 팀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맞다. 보고서….'
카페인으로 확 뚫린 혈관은 순식간에 팀장의 얼굴로 다시 조여들었다.
'보고서를 쓰려고 새벽같이 나온 건데, 어쩌다 이렇게 까맣게 잊어버릴 수가 있지? 큰일이다. 빨리 가자.'
나 과장은 한 손에 아메리카노를 든 채, 인사할 겨를도 없이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안녕히 가세…”
나 과장은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목소리에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다.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문이 닫혀 버린 것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인사라도 할까? 아니야. 문도 닫혔는데 굳이 그럴 필요 있나.'
그럼에도 나 과장은 본능처럼 고개를 돌렸다.
문 너머로, 직원의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바 테이블 뒤에서 나과장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