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손가락도 춤추게 한다.
#본격 직장·가족 판타지 소설
'앗, 뜨거!'
가득 찬 커피가 손등 위로 넘쳤다. 처리할 겨를도 없었다. 나 과장의 머릿속은 온통 보고서로 가득했다. 회사로 향하는 길은 오르막. 빠른 걸음에 숨이 차올랐다. 헉헉거리며 올라서니 저 멀리 회사 건물이 보였다.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모습은 마치 게임 속 끝판 대장이 버티고 있는 던전 같았다. 그는 기사처럼 굳은 결심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도 잘해 보자. 버티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팀장 앞에서 쫄지 말고, 파이팅이다. 스마일, 스마일!’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마침 주차된 차량의 검은 창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를 살피고 커피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양손으로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차창에 비친 하늘로 치솟은 양쪽 입꼬리를 확인하며 머리까지 다듬는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전사의 심장을 차창을 통해 확인한 것이다.
‘아직 7시 전이니까 9시까지 두 시간은 집중할 수 있겠지. 기본 틀은 있으니 본부장님 지시 위주로 채워 넣자. 일단 해보자.’
“안녕하세요, 기사님!(최대한 활기차게! 스마일, 스마일!)”
“아이고,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급한 일이 있어서요. 수고하세요!(한번 더 활기차게! 스마일 스마일!)”
“근데 어제 한잔 하셨어요? 오늘 좀 피곤해 보이시네.”
‘젠장, 그새 입꼬리가 내려간 거야?’
“뭐 항상 피곤하죠.”
“나 과장님 오늘도 파이팅 하십시오!”
보안 직원이 나 과장의 얼굴을 알아보고 출입문을 그냥 열어 주었다. 그깟 아이디카드로 태깅 하나 안 했을 뿐인데 나 과장은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억지로 올리지 못하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 구부정한 목부터 집어넣었다. 이른 아침이라 나 과장 혼자였다. 사무실이 위치한 8층 버튼을 누르며, 거울처럼 반사되는 엘리베이터 벽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구부정한 어깨와 C자형 목은 얼마 전 먹다 버린 닭 모가지를 떠올리게 했다. 그 위에 얹힌 얼굴에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두 눈과 윗입술, 뭉툭한 코, 그리고 간신히 걸쳐진 검은 뿔테 안경. 정면이 아닌 사선으로 비친 자신의 옆모습은 생각보다 더 처참했다. 처참함의 화룡점정은 허옇게 드러난 정수리였다. 그는 차마 정면을 마주하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바닥만 보며 도착하자마자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사무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순간 두려움이 밀려왔다.
‘저 어두운 곳에서 또 하루를 어떻게 버티지? 저기 깊숙한 어딘가에서 팀장이 내 목을 조를 것만 같아.’
“안녕하세요, 나 과장님. 거기 서서 뭐 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김여사님.”
“오늘 엄청 일찍 나오셨네요?”
“오늘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요. 원래 이렇게 일찍 오시나 봐요?”
“우리야 뭐, 항상 이 시간에 나오죠.”
“고생이 많으세요, 김여사님. 그럼 수고하세요.”
아이디카드를 태그 하니 커다란 유리 양개도어가 활짝 열렸다. 8층 청소 담당이신 청소 아주머니는 종종걸음으로 본부장실 쪽으로 바쁘게 향했다.
“나 과장님, 저기 문 옆에 있는 스위치 좀 켜줘 봐요.”
“아, 네.”
벽에 있는 스위치를 켜자 사무실이 환해졌다.
‘자자 빨리빨리 시간이 얼마 없어’
나 과장은 어제 팀장과 본부장의 얼굴이 어른거려 지체할 수 없었다. 밤새 머릿속을 괴롭히던 보고서 내용을 당장 서식에 뱉어내고 싶었다. 컴퓨터를 켜고 회사 업무 포털을 열었다. 어제 오후를 비워낸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안 읽은 메일이 수십 통, 미결재 문서도 수십 건. 숫자로 확인된 업무량에 나 과장의 마음은 철컹 내려앉았다.
“이런 젠장, 긴급 건이 다섯 개나 있어? 진급도 안 시켜 주면서 시키는 건 왜 이렇게 많아? 지겹다, 지겨워.”
사무실 안이 나 과장의 짜증 섞인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이른 새벽, 텅 빈 사무실은 그를 잠시 용감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 책상 아래까지 살폈다. 불 꺼진 본부장실 너머도 까치발을 들어 확인했다. 그제야 나 과장은 사자가 되었다. 사무실 땅은 내 구역이라고 표효하듯 으르렁거렸다.
“이런 개자…”
“끼익—”
양개도어가 움직이는 순간, 포효하던 사자는 순식간에 꼬리 내린 강아지로 변했다. 조심스럽게 출입문 쪽으로 눈을 굴렸다. 그곳엔 청소 아주머니가 마대걸레를 들고 무심히 서 있었다.
“아우, 어떤 놈의 새끼인지 더러워 죽겠어. 어젯밤에 뭘 처먹었는지 똥을 그렇게 싸놔서 변기통을 막아놨네. 뚫어도 뚫어도 뚫리질 않아. 썩을 놈.”
누구 들으라는 듯, 그녀의 혼잣말이 텅 빈 사무실을 메웠다. ‘썩을 놈’이 난무하는 사무실에서, 청소 아주머니의 마대가 지릿한 냄새와 함께 의자를 퉁퉁 건드리며 진동을 일으켰다. 나 과장의 발까지 계속 충격을 주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무릎을 굽혀 다리를 의자 위로 올렸다. 기다렸다는 듯 청소 아주머니는 나 과장의 책상 아래를 마대질하며 거침없이 훑었다. 지나간 자리마다 퀴퀴한 냄새가 퍼졌다. 화장실 청소에 기분이 나빠진 청소 아주머니의 마음도 온 사무실에 진동을 했다.
모니터 아래 시계는 7시를 조금 넘겼다. 팀장이 오는 시간은 8시 40분.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반. 창 너머 빌딩 숲 뒤로 둥근 태양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여명의 조명 아래, 모니터 불빛은 스포트라이트가 되어 나 과장을 비췄다.
나 과장의 손가락은 어느새 댄서가 되어 있었다.
- 타닥, 타다닥!
키보드 위에서 춤을 췄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탭댄서가 탄생한 순간. 그 시간만큼은 그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노래의 끝을 알리듯 화려한 리듬이 사그라지자, 새벽에 사 온 커피도 바닥이 났다.
“어디 보자. 오타 확인하고, 팀장이 글자 간격 줄이는 거 싫어하니까 그대로 두고, 좋아하는 화살표는 여기. 글자 크기는 12, 바탕체. 여긴 진하게, 밑줄 쫙. 이 정도면 됐겠지? 아차, 마침표 하나 빠졌네. 큰일 날 뻔. 여기 띄어쓰기 두 칸인데 한 칸만 했네. 젠장, 몰라. 그냥 여기까지 하자. 이제 좀 쉬자.”
“아이고, 과장님. 뭐 하시길래 그렇게 집중을 하세요? 제가 와도 전혀 모르시던데요.”
“아, 타 대리 언제 왔어? 팀장님이 시킨 게 있어서 정신이 없었나 보네.”
“오늘은 좀 괜찮으세요? 어제 많이 힘드셨을 텐데.”
“뭐,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팀장님은 별 얘기 없으셨어?”
“지도 인간이면 뭐라 하겠어요? 아니, 승진 대상자 1위를 어떻게 했길래 그렇게 미끄러지냐고요. 그래서 그런지 어제는 별 얘기는 없었어요.”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8시 40분. 사무실 자동 양개도어가 힘차게 열리며 거침없는 발소리가 다가왔다.
타닥, 타닥, 타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