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y Brew

처음의 설렘

by 폭풍속 부푼돛

#본격 K-직장·가족 판타지 소설




회사 문을 나오니, 하늘 한가운데 붉은 그믐달이 걸려 있었다. 유난히 크고, 선명했다. 나 과장은 음침한 하늘 아래, 왼쪽으로 부푼 C자 모양의 달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오직 퇴근의 기쁨을 만끽하기에 바빴다.

“아이고, 힘들다… 그래도 나오니까 상쾌하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회사 밖의 공기가 몸속의 탁한 공기와 맞바꿨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회사에서 나왔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새로운 세상이었다.


까맣다 까만 하늘 아래, 스타벅스의 청록색 불빛이 영롱하게 빛났다. 하지만 나 과장은 그 빛을 지나쳐, 옆에 있는 노란 불빛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치 한여름밤 가로등을 태양이라 착각하는 눈먼 파리처럼.

평소 밤에는 커피 한 잔도 입에 대지 않던 그였지만, 자연스레 ‘이모션 커피’라는 간판이 걸린 문을 밀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모험가님.”

“네…? 모험가요?”

바 테이블 너머의 직원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미소로 그를 맞았다. 나 과장은 흠칫 놀라 멈칫했다.

“그럼요, 모험가님. 저번에 오셨을 때 멤버십 카드에 적어주셨잖아요. 여기.”

직원이 수북이 쌓인 멤버십 카드 더미에서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아… 네. 고맙습니다.”

“오늘도 따뜻한 아메리카노 드시겠어요?”

“아니요.”

그는 짧게 대답했다. 오늘만큼은, 직장에서 쓰던 ‘나 과장’의 얼굴을 벗고 싶었다.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커피를 마시며 버텨온 자신을 잠시 내려놓고 싶었다.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문하고 싶었다.

“저기… 여기 특별한 커피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럼요.”

직원의 미소가 깊어졌다.

“저희 가게 이름이 ‘이모션 커피’잖아요. 저희는 감정별로 스페셜 커피를 제공합니다.”

“그럼… 그 커피, 마시고 싶습니다.”

직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메뉴판을 꺼내왔다. 검은 가죽 커버의 메뉴판을 펼치자, 그 안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단어들이 반짝였다.

“저기… 욕망 커피 주문할 수 있을까요?”

직원이 잠시 미소를 거두었다.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욕망 커피는 지금 제공해 드릴 수 없어요. 욕망을 추출하기가 쉽지가 않거든요.”

나 과장은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다시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대신 오늘 추천드릴 메뉴가 있습니다. ‘기쁨 커피’ 어떠세요? 마침 오늘 ‘기쁨 원두’를 로스팅했거든요. 라이트 로스트로 산미가 깃든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일품이에요.‘처음의 설렘’이라는 별명도 있죠. 신선도가 좋아서 최고 품질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나 과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쁨 커피 한 잔 주세요.”

직원은 가볍게 인사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원두 보관실’이라 적힌 문 아래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잠시 후, 마치 신줏단지를 모시듯 두 손에 유리병을 들고 나왔다. 유리병 안에는 황금빛 원두가 가득했고, 라벨에는 정성스럽게 손글씨로 적힌 글자가 있었다. '기쁨 원두'

“모험가님,”

직원이 말했다.

“그럼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추출하겠습니다. 시간이 조금 걸릴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죠?”

“네네, 당연하죠.”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직원은 바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드리퍼, 서버, 필터를 세팅했다. 그 손길에는 묘한 집중과 예의가 깃들어 있었다.

“핸드드립은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커피를 추출하는 과정이에요.”

직원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최상의 커피를 만들기 위해선 기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바리스타의 태도라고 생각해요. 그 태도의 근본에는 고객님 같은 분에 대한 존중, 그리고 커피에 대한 애정이 있죠. 명장이 되려면 기술뿐 아니라 영혼, 그리고 그만한 감정이 투입되어야 한다고 믿어요. 그것이 바로 ‘이모션 커피’의 철학입니다.”

직원는 잠시 숨을 고르고, 미소 지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직원은 먼저 작업용 비닐장갑을 꼈다. 그리고 유리병 속의 원두를 꺼냈다. 손끝에서 떨어지는 낱알들은 마치 오래된 기억의 씨앗 같았다. 아직 향은 없었지만, 손바닥에 닿는 감촉만으로도 그 속에 묻힌 수많은 감정의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직원은 조용히 그라인더의 손잡이를 잡았다. 손목이 천천히 움직이자, 안쪽에서 사각, 사각 부서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단순히 원두가 부서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의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 혹은 오랜 침묵이 다시 말을 시작하는 소리 같았다.

곧 향이 따뜻하고 쌉쌀한 공기 속으로 퍼지며 이 공간 전체가 하나의 ‘기억의 방’처럼 변해갔다. 직원은 그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마음을 내릴 시간이에요.”


드리퍼 위에 부서진 원두가 차곡차곡 쌓였다. 직원은 그것을 ‘감정의 잔해’라 불렀다. 뜨거운 물이 닿기 전까지, 그것은 아직 아무 의미도, 아무 색도 없는 어둠이었다.

첫 물방울이 닿자, 커피가 부풀어 오르며 숨을 쉬었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무언가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억눌린 감정이 고요히 숨을 내쉬며 작은 기포로 피어오르는 장면은 마치 영혼이 눈을 뜨는 듯했다. 그건 누군가의 하루, 혹은 아직 끝나지 않은 마음의 의미였다.

직원은 원을 그리며 천천히 물을 부었다. 물은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감정의 틈새를 스며들었다.


‘기쁨’이라는 감정은 '상큼한 설렘'으로 변했고, 모든 감정이 여과되어 서버 아래로 천천히 모여들었다. 뜨거운 물은 김을 만들어내며 공간을 덮었다. 순식간에 이곳은 구름 속 하늘나라가 되었다. 구름 속 흐릿하게, 신비하게 변한 직원의 얼굴에서 나 과장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직원의 눈동자는 오직 커피에만 집중돼 있었고, 입술은 단단히 다물려 있었다. 그는 이유 없이 가슴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고요함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함이 피어올랐다.


직원은 마지막 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 시간 동안 세상은 잠시 멈춘 듯 고요했다. 남은 것은 미묘한 향기와, 인생의 감정이 여과된 커피 한 잔이었다. 직원은 그것을 들어 빛에 비췄다. 커피는 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은근한 빛을 머금은, 마치 살아 있는 그림자 같았다.

잔에 커피를 따르며 직원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 잔을 나 과장에게 건넸다.

“처음의 설렘, 기쁨 커피입니다.”


나 과장은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스팀이 가볍게 피어올랐다. 향은 분명 커피였지만, 그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한 온기가 섞여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 머금었다. 입안에 퍼지는 건 단지 부드러운 온도, 그리고 아주 미세한 산미뿐만이 아니었다. 커피는 천천히 혀끝을 타고, 신경을 따라 뇌 속의 뉴런을 두드렸다.


어느 따뜻한 봄날 오후, 햇살 아래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햇빛이 비스듬히 내려와 눈부셨고, 그날의 공기, 향기, 소리까지 되살아났다. 커피 한 모금에 모든것이 있었다. 나 과장은 잔을 든 채, 직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건… 커피가 아니야.”

“네?”

“이건, 아직 식지 않은 누군가의 순간이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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