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서서히.
#본격 K-직장·가족 판타지 소설
“네? 뭐라고 하셨어요? 모험가님, 괜찮으세요?”
나과장은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단순한 현기증은 아니었다. 몸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거대한 파동이 밀려오는 느낌.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파문처럼 잠깐 모든 감각이 흔들렸다. 다리에 힘이 빠졌지만, 다행히 중심은 잃지 않았다. 커피를 삼킨 뒤 몇 초간의 기억이 통째로 비어 있었다.
“아… 갑자기 현기증이 왔나 봐요. 제가 오늘 좀 무리했나 봐요.”
“그럴 수 있죠. 오늘은 빨리 쉬시는 게 좋겠어요.”
“네… 결제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모험가님!”
얼굴이 달아올라 나과장은 서둘러 카페를 나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을 만큼, 거대한 에너지가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몸과 마음이 가볍고, 세상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상한데… 커피에 뭐라도 넣은 거 아니야?”
그러다 문득 커피를 놓고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한 모금밖에 못 마셨는데… 뭐, 다시 들어가긴 애매하고…”
그는 스스로를 설득하듯 중얼거리며 지하철역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나 신날 리가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기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어둠이 짙게 깔린 12차선 도로 옆 인도 한복판에서 폴짝 뛰었다. 그다음에는 더 높이 뛰어 구두 밑창을 부딪혔다. '짝', '짝' 맞부딪히는 소리에, 나과장은 어린아이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지나가던 행인 몇 명이 이상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럴수록 그는 더 환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밤이에요!”
행인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지만, 오늘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나과장은 현관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뭐였더라… 0801?”
- 삐삐삐삐
틀렸다.
“아, 왜 이러지… 0401…”
- 디리릭
문이 열렸다.
현관문으로 열리는 틈새로 어슴푸레 빛이 들어와 새까만 거실이 환해졌다.
아내와 딸은 잠들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조용히 씻고 잠들었겠지만, 이상하게 두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딸아이 방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잡고 아래로 내렸다. 그런데 철컥, 하며 열려야 할 문고리가 속절없이 내려가기만 했다.
‘어? 왜 이래?’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손잡이를 위로 들어 올리자 철컥하고 열렸다.
'아, 맞아. 이거 고쳐달라고 했었지…'
예전에 아내와 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완전히 잊고 있었네… 미안하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포근한 공기가 살며시 밀려왔다. 벽에 걸린 보름달 수면등 아래, 우리는 애착인형을 품에 안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 인형은 우리가 처음으로 이 방에 오던 날, 요람 옆에 조심스레 놓아두었던 바로 그 인형이었다. 하얀 털은 이제 회색빛으로 바랬고, 팔과 다리는 솜이 죽어 축 늘어져 있었다. 세월이 인형을 낡게 만들수록 우리는 그만큼 자라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과장은 문득, 그 인형이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그래도 너는 나보다 낫다. 볼품없어져도… 누군가의 품 안에 남아 있으니까.'
나과장은 잠든 딸 얼굴 앞에서 멈춰 섰다.
“벌써 이렇게 컸네…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맙다. 언제나 아빠가 지켜줄게. 사랑한다. 우리야.”
“… 아빠… 나도 사랑해…”
우리의 입은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나과장의 귀로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딸은 아빠를 사랑한다고 매일 말하던 아이였다. 중학생이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서서히,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나과장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이 방에 들어왔던 날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언젠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관계의 결마저 희미해져 버리겠지. 이 모든 것이 일상이 되어버리고, 자연스러워지는 것. 새벽 동쪽 하늘에서 떠 저녁 서쪽으로 지는 그믐달처럼.
조용히… 서서히…
나과장은 문득 이 방을 나서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딸의 얼굴도, 이 포근한 공기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우리야… 아빠는 너를 사랑해. 근데 아빠가 좀 이상해. 왜 다시는 널 못 볼 것 같지…? 아빠가 지켜준다고 했는데… 왜 네가 나를 지켜줘야 할 것 같지…? 우리야, 아빠 손 좀 잡아줘… 제발… 놓지 말아 줘…"
그 순간, 갑작스러운 금속성의 날카로운 파열음이 그의 고막을 베어냈다. 예리한 칼날이 귓속을 도려냈다. 그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바닥에 무너졌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바닥에 엎어졌다. 의식이 희미해졌다. 멀리서, 딸의 손이 보였다.
“우리야… 손… 좀… 잡아…”
“여보? 여기서 뭐 해?”
아내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어? 몇 시야…?”
“어제 술 마셨지?”
“… 아니… 그냥… 기억이 좀…”
"근데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아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괜찮아? 몸 좀 챙겨. 힘들면 힘들다고 하고.”
"응… 뭐… 괜찮아. 남들도 다 이렇게 살아가는데. 나라고 별 수 있나”
한동안 말이 끊겼다.
“며칠 전에 수연이 아빠 쓰러졌대. 지금 상황이 좀 안 좋나 봐.”
- 삐리리 삐리리
알람이 울렸다.
“준비해. 나 아침 해야 돼.”
“어… 알았어.”
나과장은 갑자기 아내의 손을 붙잡았다.
“왜 그래?”
“아니… 그냥. 오늘이… 이상하게 마지막 날 같아.”
“풋…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얼른 씻어.”
아내는 싫은 내색 대신 살짝 웃으며 마지못해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 두 사람의 손끝이 떨어지는 찰나, 나과장은 다시 한번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마지막이 아닌 것처럼,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여보… 사랑…'
“엄마, 아빠 뭐 해?”
우리가 눈을 비비며 웃었다.
“둘이 손 잡고 뭐 하는데~”
아내와 딸이 함께 웃었다. 오랜만에 셋이 같은 공간에 모인 아침이었다.
“우리야, 얼른 학교 갈 준비 하자.”
“아빠 먼저 씻어요. 근데 우리 다 같이 있는 거 진짜 오랜만이네.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
창밖 서쪽 하늘에 C자 모양 달이 조용히 떠오르고 있었다.
“나 먼저 갈게. 학교 잘 다녀와.”
“응, 아빠 안녕!”
“여보, 잘 다녀와요.”
“… 안녕…”
문이 닫혔다. 어슴푸레 새어 나오던 빛마저 사라지며, 새까매졌다.
아무 특별함 없이. 원래 아침이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