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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폭풍속 부푼돛 Oct 08. 2021

지하철 명당을 찾아라

불편함을 불량함으로 버티는 공간

우리나라에서 명당의 개념은 꽤나 특별하다. 배산임수라는 풍수학이 말해주듯이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뿐 아니라 죽은 사람이 머무르는 장소까지 명당에 대한 갈망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요즘은 명당이라는 단어보다 노른자라는 단어를 쓰더라. 대한민국의 노른자라 하면 서울 강남구가 떠오른다. 나 역시 명당에 대한 갈망이 남다르다. 모두가 강남으로 뱃머리를 돌리고 있지만 나의 뱃머리는 지하철 명당으로 향하고 있다.




오늘도 지하철에 발을 내딛으며 자리를 탐색한다. 이른 시간이기에 자리가 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데군데 자리가 차 있다.

'젠장~ 내가 원하는 자리에 다 앉아있네.'

내가 지하철을 타자마자 찾는 자리는 '가장자리'이다. 나는  이 자리를 '자유의 자리'라고 부른다. 비록 완전한 자유는 아니지만 한쪽 어깨와 팔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머리를 벽에 기댈 수 있으니 자유와 안락함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다. 지하철의 대표적인 노른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가장자리가 꽉 차 있으니 그다음으로 눈길을 돌릴 수밖에... 내가 그다음으로 선호하는 자리는 열차의 종류마다 다를 수 있는데 머리를 뒷벽에 기댈 수 있는 자리이다. 보통의 자리는 머리 뒷 쪽 창문의 유리가 있어 머리를 기댈 수 없다. 하지만 의자들 중 어떤 자리에서는 창문과 창문 사이 절묘한 면이 있어 머리를 충분히 기댈 수 있다. 그래서 난 이 자리를 '안락함의 자리'라고 부른다.

안락함의 자리는 그나마 앉을 여유 있어 출구와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고 머리를 뒤로 기대고 눈을 감아본다. 록 강남의 노른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하철의 노른자 중심도 아니지만, 노른자 언저리를 선점했다는 안도감으로 안락함을 즐긴다.

이런 자리가 주는 안락함과 편안함은 출근을 하는 직장인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그나마 앉아서 갈 수 있기에 한 시간이라는 출근 시간을 버틸 수 도 있다. 그래서 자리에 대한 집착은 더욱 심해지는 듯하다. 최대한 편한 자세를 유지하여야만 한다. 쓸데없는 에너지를 소비해서는 안된다. 지하철 안에서만이라도 좀 편하게 가자. 그래서 지하철의 노른자 자리의 가치는 강남의 노른자 못지않을 수도 있다.

나 역시 노른자에 대한 갈망은 누구 못지않았다. 그만큼 편안함과 안락함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새벽 출근시간, 그날은 운이 좋게도 가장 좋아하는 자유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런 날은 기분이 좋다. 자유와 안락함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음에, 이런 것이 소확행이라 자위하며 책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필기구를 사용하면서 책을 읽는지라 조금은 번잡스럽다. 두 손에 책을 들고 잠과의 싸움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옆자리에서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안 그래도 좁은 자리에서 나는 내 나름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옆자리의 주인도 자기 나름대로 자리를 차지하니 서로 불편한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누구를 탓할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를 주며 불편함을 마음속으로 토로하고 있었다.

책을 읽는 나의 행동이 옆자리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유의 자리는 그 순간부터 가시방석으로 변했다. 옆사람의 눈치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자유를 찾기 위해 자유의 자리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탈출은 편안함과 안락함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다.


또 다른 자유를 찾아 이리저리 서성였다. 복잡한 출근시간 지하철에서 내가 머물 곳은 어디인가. 어디가 가장 자유로운 공간일까. 나만의 명당을 찾아 떠나는 또 하나의 여정이었다. 내가 필요한 공간은 사람의 동선이 가장 적은 곳이어야 하고 짱 박혀서 사부작사부작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래! 바로 여기다.'

그렇게 내가 찾은 나만의 지하철 명당은 두 군데다. 출근시간에는 노약자, 장애인 자리의 객차 사이 출입문이다. 이용객의 동선이 없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덜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기댈 수 있는 벽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퇴근시간에는 지하철 가장 끝 객차의 벽이다. 본의 아니게 빠른 환승을 위해 끝 객차를 이용하면서 발견한 공간이다. 지하철의 끝에 광활한 공간이 존재한다. 나는 이곳을 '끝 공간'이라고 부른다. 이 두 공간은 당연히 의자만큼이나 안락하지도 않고 편안하지도 않다. 오히려 서서 가야 하는 불편함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불편함은 의외로 매력적인 구석이 있다. 불편함의 가장 큰 매력은 지하철에서의 최대 적인 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옆사람 시선과 상관없이 마음껏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다. 안락함을 포기하니 뜻밖의 행운의 손님, 자유로움이 찾아왔다. 

내가 선택한 지하철 명당은 모두 벽이 있다. 벽에 어깨를 살짝 기대고 짝다리를 짚는 자세가 중요하다. 약간은 불량하게 보이는 이 자세가 불편함을 버티는데 한몫한다 이 자세를 제대로 잡으면 출퇴근러들의 비호를 받으며 책읽기와 글쓰기가 마음껏 가능하니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나보다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약간의 불편함과 약간의 불량한 자세만 가능하다면 한 시간이 무어랴. 서울에서 부산 왕복까지 가능할 거 같다.

불편함과 불량함은 지하철 명당을 고르는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출근의 한 시간을 자유롭게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신영복 선생님은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불편함이야 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있게 하는 것,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 받는 것이다. p.72

살아가면서 느끼는 불편함은 어쩌면 우리의 숙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그렇게도 안락함과 안함의 끈을 놓지 못하고 쫓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불편함을 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편함을 인정하고 불편함의 바다에 빠지는 것이 불편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 이리라. 그렇다고 불편함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다가 빠져 죽으면 안 될 것이다. 바다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유유히 헤엄치며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즐길 수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그 방법을 지하철 명당에서 찾았. 불편함을 불량함으로 버틸 수 있는 새로운 공간에서, 나는 선명하고 넓디넓은 바다를 맞이 할 수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지하철 어딘가 벽에 기대어 짝다리를 짚고 글을 쓰고 있다. 실제로 짝다리로 한 시간이 약간 힘들긴 하다. 짝다리로 서울 부산 왕복이 거뜬하다는 말은 취소해야겠. 벽에서 떨어져 회사로 향하는 힘찬 발걸음 대신 삐그덕 거리는 무릎 관절이 걱정이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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