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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폭풍속 부푼돛 Oct 01. 2021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이유, '자뻑'

지하철 도서관, 오늘도 성업 중

지하철에서 무언가 한다는 것은 꽤나 애매하다. 흔들리는 공간에서 두 발로 균형을 잡아가며 집중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는 것도 않을뿐더러 혹여나 앉아 있더라도 어깨와 무릎을 최대한 웅크리고 집중하는 것도 고역이다. 하지만 나의 손에는 핸드폰이 있다! 우리 시대의 최고의 발명품 드폰! 핸드폰이라는 창문을 통해 나는 자유를 찾는다. 땅속 깊숙이, 모르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히는 이 좁디좁은 공간에서 자유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다. 핸드폰만 있으면 하루 종일 시간을 때울 수 있을 거 같지만 그것도 고작 15분이다. 어깨도 아프고 눈도 침침하다. 잠은 또 왜 그렇게 오는지 주체할 수 없는 내 몸은 더 이상 내 몸이 아니다. 그럴수록 자유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불편해진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기 전 새벽,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이렇게 보낸다는 사실에 갑자기 현타가 왔다. 지속적이고 마음이 울릴 수 있는 무언가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자격증 공부도 좋을 거 같다. 아니면 역사 동영상 몰아보기도 잘만하면 좋을 거 같기도 한데... 그러던 중 책가방에서 책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몇 달 전부터 읽으려고 넣어두었던 애물단지 책이었다.

'그래 지하철에서는 너로 정했다!'

가장 간단하고 부담도 없다. 평소 책 읽기를 즐기는 사람으로서 책 한권만 두 손에 주어진다면 그깟 한 시간은 금방 지나갈 거라 생각했다. 지하철에서의 왕복 2시간은 책 읽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마음을 먹자 출근 시간이 내심 기대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두근거리기 까지도 다. 그게 뭐라고, 책 읽기가 뭐라고. 나에게 새롭게 찾아오는 새벽의 설렘이었다. 고단하고 반복되는 일상을 묵묵히 버티는 직장인의 출퇴근 시간이 여행자의 설레는 여정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어린 시절, 소풍 가는 날 아침, 거짓말 좀 더 보태서 크리스마스 아침이 다시 찾아온 듯했다.




책이 핸드폰보다 좋은 점은 지속 가능하다는 점이다. 책은 나의  두 손에서 핸드폰보다 더 오래 버틴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목적이 있는 폰의 사용 시간은 좀 더 지속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나의 경우는 확실히 책의 완승이었다.

솔직히 눈으로 글자를 인식해서 머리에서 추상화하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 더군다나 잠이라는 놈이 계속 방해를 하니 책을 덮어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어쩌면 책 읽기라기보다는 책 버티기라고 말하는 게 더 맞는지 모른다. 이럴 바엔 그냥 한숨 자거나 재밌는 동영상이나 보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늘어지게 한숨 자고 내가 좋아하는 역사 동영상도 보고 게임도 해봤지만 결국은 책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책 버티기가 다른 것들보다 좋았다. 책 버티기 일지라도 책을 놓지 않는 나만의 이유가 있었다. 지하철에서 책을 보는 특별한 이유 말이다.


그것은 바로 자뻑이다.


내입으로 이런 얘기 하는 게 부끄럽지만 자뻑은 책 읽기에 있어서 커다란 버팀목이다. 책은 나를 남들과 다르게,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지하철 한 칸에 책 읽는 사람은 한두 명 있을까 말까 하니 충분히 특별하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책을 읽는지 마는지 신경도 안 쓰겠지만 나는 애써 현실을 부정해본다.

새벽시간에 가방에서 책을 꺼내 두 손에 둔다. 책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어깨의 뽕은 가벼워진다. 그 순간 책부심을 부리며 내가 특별해짐을 느낀다.

'너희들은 꾸벅꾸벅 졸거나 핸드폰으로 시간을 때우지만 난 좀 달라. 새벽에도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지적인 도시남이라고!'ㅋㅋㅋㅋㅋㅋ(웬만하면 웃음 초성을 안 쓰지만 안 쓸 수가 없다.)   

나만의 자뻑이라도 있어야지 책을 읽을 수 있다니 조금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솔직한 나의 마음이다. 그래도 뭐 어떤가. 자뻑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소심한 자뻑을 그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자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책을 중심으로 선순환을 일으킨다. 책을 읽다 보면 한 번씩 짜릿한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이 순간 때문에 책을 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런 순간을 출근시간에 느낀다는 사실이 나의 자뻑에 품격이 더해진다. 이제는 저렴한 자뻑의 수준이 아니다. 지하철에서 깨어있는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는 고급스러운 자뻑으로 변모한 것이다.

'내가 이 맛에 지하철을 타는 거지!'

마음속에서 환호성이 터지고 두 눈이 번쩍 뜨인다. 지하철 안은 더욱 선명해진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꿈틀 댄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만 만들어 낼 수 무언가. 이것은 회색 지하철을  오색 찬란한 지하철 도서관으로 바꾸어 준다.




출퇴근을 위한 지하철 2시간은 누구에게나 버티기 힘든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나만의 지하철 도서관 2시간은 자유를 찾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이제는 이 2시간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시간이 되었다. 더 길면 길어야지 더 이상 짧아서는 안될 이상한 상황으로 승화되었다. 이제는 지하철 도서관뿐 아니라 지하철 글쓰기 교실로도 활용하니 지하철의 확장성은 어마어마하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지하철, 나만의 지하철 도서관이 오늘 새벽에도 성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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