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무언가 한다는 것은 꽤나 애매하다. 흔들리는 공간에서 두 발로 균형을 잡아가며 집중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자리에 앉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혹여나 앉아 있더라도 어깨와 무릎을 최대한 웅크리고 집중하는 것도 고역이다.하지만 나의 두 손에는 핸드폰이 있다! 우리 시대의 최고의 발명품 핸드폰! 핸드폰이라는 창문을 통해 나는 자유를 찾는다. 땅속 깊숙이, 모르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히는 이 좁디좁은공간에서 자유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다. 핸드폰만 있으면 하루 종일 시간을 때울 수 있을 거 같지만 그것도 고작 15분이다.어깨도 아프고 눈도 침침하다. 잠은 또 왜 그렇게 오는지 주체할 수 없는 내 몸은 더 이상 내 몸이 아니다. 그럴수록 자유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불편해진다.핸드폰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단한하루를 보내기 전 새벽,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이렇게 보낸다는 사실에 갑자기 현타가 왔다. 지속적이고 마음이 울릴 수 있는 무언가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자격증 공부도 좋을 거 같다. 아니면 역사 동영상 몰아보기도 잘만하면 좋을 거 같기도 한데... 그러던중 책가방에서 책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몇 달 전부터 읽으려고 넣어두었던 애물단지 책이었다.
'그래 지하철에서는 너로 정했다!'
가장 간단하고 부담도 없다.평소 책 읽기를 즐기는 사람으로서 책 한권만 두 손에 주어진다면 그깟 한 시간은 금방 지나갈 거라 생각했다.지하철에서의 왕복 2시간은 책 읽기로 결정했다.이렇게 마음을 먹자 출근 시간이 내심 기대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두근거리기 까지도 했다. 그게 뭐라고, 책 읽기가 뭐라고. 나에게 새롭게 찾아오는 새벽의 설렘이었다. 고단하고 반복되는 일상을 묵묵히 버티는 직장인의 출퇴근 시간이 여행자의 설레는 여정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어린 시절, 소풍 가는 날 아침, 거짓말 좀 더 보태서 크리스마스 아침이 다시 찾아온 듯했다.
책이 핸드폰보다 좋은 점은 지속 가능하다는 점이다. 책은 나의 두 손에서 핸드폰보다 더 오래 버틴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목적이 있는 핸드폰의 사용 시간은 좀 더 지속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나의 경우는 확실히 책의 완승이었다.
솔직히 눈으로 글자를 인식해서 머리에서 추상화하는 작업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더군다나 잠이라는 놈이 계속 방해를 하니 책을 덮어버리는 일이 허다했다.어쩌면 책 읽기라기보다는책 버티기라고 말하는 게 더 맞는지 모른다. 이럴 바엔 그냥 한숨 자거나 재밌는 동영상이나 보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늘어지게 한숨 자고 내가 좋아하는 역사 동영상도 보고 게임도 해봤지만 결국은 책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책 버티기가 다른 것들보다 좋았다. 책 버티기 일지라도 책을 놓지 않는 나만의 이유가 있었다. 지하철에서 책을 보는 특별한 이유 말이다.
그것은 바로 자뻑이다.
내입으로 이런 얘기 하는 게 좀 부끄럽지만 자뻑은 책 읽기에 있어서 커다란 버팀목이다. 책은 나를 남들과 다르게,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실제로 지하철 한 칸에 책 읽는 사람은 한두 명 있을까 말까 하니 충분히 특별하다고도 할 수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책을 읽는지 마는지 신경도 안 쓰겠지만나는 애써 현실을 부정해본다.
새벽시간에 가방에서 책을 꺼내 두 손에 둔다. 책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어깨의 뽕은 가벼워진다. 그 순간 책부심을 부리며 내가 특별해짐을 느낀다.
'너희들은 꾸벅꾸벅 졸거나 핸드폰으로 시간을 때우지만 난 좀 달라. 새벽에도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지적인 도시남이라고!'ㅋㅋㅋㅋㅋㅋ(웬만하면 웃음 초성을 안 쓰지만 안 쓸 수가 없다.)
나만의 자뻑이라도 있어야지 책을 읽을 수 있다니 조금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솔직한 나의 마음이다. 그래도 뭐 어떤가. 자뻑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못하는 소심한 자뻑을 그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자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책을 중심으로 선순환을 일으킨다. 책을 읽다 보면 한 번씩 짜릿한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이 순간 때문에 책을 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런 순간을 출근시간에 느낀다는 사실이 나의 자뻑에 품격이 더해진다. 이제는 저렴한 자뻑의 수준이 아니다.지하철에서 깨어있는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는고급스러운 자뻑으로 변모한 것이다.
'내가 이 맛에 지하철을 타는 거지!'
마음속에서 환호성이 터지고 두 눈이 번쩍 뜨인다. 지하철 안은 더욱 선명해진다.마음 깊숙한 곳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꿈틀 댄다.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만 만들어 낼 수 무언가다.이것은 회색 지하철을 오색 찬란한 지하철도서관으로 바꾸어준다.
출퇴근을 위한 지하철 2시간은 누구에게나 버티기 힘든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나만의 지하철 도서관 2시간은 자유를 찾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이제는 이 2시간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시간이 되었다. 더 길면 길어야지 더 이상 짧아서는 안될 이상한 상황으로 승화되었다.이제는 지하철 도서관뿐 아니라 지하철 글쓰기 교실로도 활용하니 지하철의 확장성은 어마어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