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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폭풍속 부푼돛 Oct 15. 2021

그들이 지하철에서 달려야만 하는 이유

'각자의 속도'의 존중

새벽 4시 55분 오늘도 어김없이 알람이 울린다. 새벽의 내려앉은 새까만 정적을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소리. 알람벨은 정적 상태에서 동적 상태로, 수평 상태에서 수직 상태로의 변화를 계속적으로 요구한다. 언제나 그렇듯 변화는 엄청난 스트레스다. 5분간 변화로 인한 내적 갈등을 뒤로하고 5시 즈음 큰 결심을 하고 직립보행을 시도한다. 사피엔스의 위대한 직립보행이 매일 새벽 5시 우리 집 방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일어나자마자 화장실로 향하고 칫솔을 꺼내 든다. 새벽의 칫솔은 볼 때마다 특별한 감정을 일으킨다. 분명히 조금 전(자기 전) 양치를 했는데 또 해야 하다니... 화장실 거울 앞에서 꺼내 든 칫솔이 야속하기 그지없다. 애꿎은 칫솔을 항해 한마디 탄식과  함께 토로한다.

"지겹다. 지겨워~"

잠이 덜 깬 나는 화장실 거울 앞 양치를 하면서 시나브로 변화에 적응하고 있다. 이제야 입안 가득 묵혀있던 더운 공기를 민트향 시원한 공기로 바꿔주는 양치의 중요함을 깨닫는다. 양치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양치를 시작으로 약 30분가량 준비하고 현관문을 나선다. 5시 59분 차를 타기 위해서는 집에서 5시 40분 전에는 출발해야 한다. 그다음 지하철도 있지만 환승시간이 다소 어긋나 조금 기다려야 한다. 출근시간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효율성을 추구하는 계획적인 직장인이기에 5시 59분 열차를 놓칠 수 없다. 꼭 타야만 한다.




5시 56분 지하철역에 도착한다. 플랫폼으로 가기 전 역 천장 모니터가 열차 운행 정보를 알려준다.

"도착하기 2분 전"

2라는 숫자가 나의 마음 요동친다. 2분이면 슬슬 걸어 내려가다 보면 열차를 놓칠 거라는 것은 출퇴근러로서 경험으로 터득한 바다. 나만이 이런 생각은 아니였으리라.

옆 사람이 스타트를 끊었다. 내 뒤에서도 타닥타닥 누군가 달려온다. 10분 뒤에 도착하는 다음 열차를 타도 늦지는 않지만 이번 열차는 무조건 타리라는 마음은 변함없다. 동시에 나의 발걸음도 빨라진다. 빨라진 발걸음은 어느새 달리기로 변해있다. 새벽 5시 57분 느닷없는 지하철역 달리기가 한창이다.


새벽 달리기의 정점은 환승역에서 그 꽃망울을 터뜨린다. 8호선과 5호선을 이용하는 나는 천호역에서 환승을 한다. 8호선 열차에서 내려 한단의 계단을 바로 내려가면 5호선 열차를 탈 수 있는 꽤나 빠른 환승이다. 빠른 환승 덕분에 불필요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나를 포함한 출퇴근러의 환승역 지하철 달리기를 경험하고는 생각이 좀 바뀌었다.

'이것은 다행이 아니다. 불행일 수도 있겠구.'


 더 빠른 환승을 위한, 아니면 환승 열차를 놓치지 않기 위한 경쟁이 열차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출입문은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으로 바뀌었다. 달리기 선수들은 수년간의 체득한 경험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결승점까지 전력질주를 하면 기다리지 않고 환승을 할 수 있다는 굳은 다짐이다. 어린 시절 운동회에서 친구 얼굴의 비장함이 떠오른다.

출발을 알리는 총성 대신 자동문이 양쪽으로 열린다. 새벽시간 열차를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까. 남은 기력모아 환승역에서 분출한다.  남녀노소 가릴 것이 없다. 그렇다면 나도 질 수없지! 계단 2칸, 3칸을 한꺼번에 내려가며 의지를 불태운다.

'그래 아직 죽지 않았어.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1등으로 열차를 탈 수 있으니까! 흐흐흐~'

자만심도 순간, 눈앞에 상대방이 나에게 달려온다. 목적지는 다르지만 나도 달리고 그도 달린다.

"어어어어~ 어어!"

(퍽!!)

내가 타려고 했던 5호선 열차에서 내린 상대방과 어깨가 심하게 부딪혔다.  순간, 달리기의 관성을 줄이지 못하고 또 다른 상대방과 거의 앉다시피 엉켜버렸다.

"어어~ 비켜요! 비켜!"

여기저기서 소리가 들린다. 이건 분명 전장에서의  비명소리다. 환승거리가 짧은 플랫폼에서 5호선을 타려는 자와 8호선을 타려는 자들이 뒤엉킨다. 어깨가 부딪히고 신체적 접촉이 있으니 육박전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야말로 웃지 못할 진기한 풍경이다. 환승이 짧아 쾌재를 부르던 나는 이제  이상 없다. 대신 환승역 현장에서 한대 맞고 얼얼한 어깨를 어루만지는 나만 있을 뿐. 내가 이 정도인데 상대방 노신사는 오죽할까. 한때는 8호선 아군이었지만 지금은 5호선 군이 된 노신사에게 심심한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5호선 열차에 기대어 거친 호습을 가다듬었다.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흡흐흐하하하~"

환승역 현장을 복기하니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하철 자동문 앞에서 긴장한 나의 모습, 계단을 두 칸 세 칸 훌쩍훌쩍 날아가는 모습, 노신사와 부딪히고 아저씨와 엉겨 붙는 웃지 못할 상황들이 나를 웃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왜 그럴까?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긴장하고, 날아가고, 엉겨 붙었단 말인가?

 빨리 가기  위해서? 환승 열차를 놓치기 싫어서?'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나왔다. 아쉽게도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한테서 말고 ''한테서 찾을 수 있었다. 물론 1분 1초가 급해서 실제로 바쁘게 움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보다 남을 의식해서 지하철 달리기가 시작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옆사람이 뛰니까, 뒷사람이 달려오니까, 남들이 다 뛰니까 나도 뛰어야만 하는 것이다. 남들은 다 타지만 나만 못 탈 수 있다는 상대적 박탈감과 불안감이 나를 달리게 하는 이유였다.

나에게 주어진 출근시간은 내가 가장 잘 안다. 아침  출근 시간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속도의 기준을 밖에서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내 안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남이 뛴다고 나까지 뛸 필요는 없다. 남은 남이고 나는 나이다. 각자의 속도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하다. 비록 그 길이 다른 길이라 할지라도 틀린 길이라 단언하지 않고 응원할 수 있는 마음, 이런 마음이 진정한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지하철에서 힘겹게 뛰고 있는 출퇴근러들을 응원하고 존중한다. 각자의 속도에는 분명히 각자의 이유가 있으리라. 나는 달리지 않을 이유가 있고, 그들은 달려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환승이 될 수도 있고, 진짜 지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 화장실이 급해서 열심히 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달려야 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만이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을 터이다. 다만 나는 지하철을 애용하는 출퇴근러들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환승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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