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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폭풍속 부푼돛 Nov 09. 2021

출퇴근 시간은 길면 길수록 좋다.

어느 '경기도-서울 출퇴근러'의 고백

출근길 지하철에서 나와 회사로 한다. 회사 가는 길, 조그마한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사서 사무실 책상에 앉는다.  책상 열쇠를 꺼내어 서랍을 열고 업무수첩에 적어 놓은 해야 할 일들을 훑어본다. 커피 한 모금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나의 분신인 컴퓨터를 켠다. 메신저에 접속  쪽지와 메일을 확인하고 전자 업무 포탈로 공람문서를 확인한다. 문서함의 문서들을 열람하면서 업무 흐름을 파악하고 업무의 우선순위를 매긴다.

'오늘도 폭풍 속을 항해하는구나.'

직장인 모드로 ''을 하고 조용하지만 강력한 파이팅을 외쳐본다.


소소하게나마  일련의 루틴들은 아침 의식과도 같다. 군대에서 말하는 민간인 물 빼는 작업이라고 나 할까? 회사 밖의 물을 빼고 직장인으로 준비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진다. 슈퍼맨은 클라크로 변할 때, 또는 클라크가 슈퍼맨으로 변할 때 휘리릭 몇 바퀴만 돌그만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대략 15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이 '직장인이라는 가면'을 쓰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 신규 시절 적어도 출근시간 20분 전에는 도착하라는 선배의 조언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가면을 쓰는 시간이 충분히 확보되어있 않으면 여러모로 쫓기게 마련이다. 결국 가면을 지배하지 못하고 가면에 종속된다. 하루 종일 불안하고 더욱 힘든 하루가 될 것이다. 회사에 일찍 도착해서 직장인이라는 가면을 지배해보려 하지만 마음대로 쉽지만은 않다.


오후 5시 사무실, 혼재되어 있는 시간.

누군가는 업무에 창 열을 올리고 있고 누군가는 업무를 정리하있다. 유연근무를 하고 있는 나에게는 퇴근시간이지만 하루 중 가장 자유롭지 못한 시간이기도 하다. 퇴근하려는 마음과 퇴근을 못하는 상황이 항상 대립을 한다. 누군가는 쿨하게 퇴근하면 되지 뭘 그렇게 눈치를 보냐고 타박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후 5시 하루 종일 안보이던 팀장이 사무실로 들어온다. 이제 일 좀 해볼까라는 자세로 상에 자리 잡는다. 이제부터 묵혀두었던 업무들이 존재감드러내기 시작한다. 오후 5시가 약간 넘은 시간, 팀장은 아무 거리낌 없이 퇴근시간이 지난 나를 부른다.

"이 업무들 마무리 지어~"

팀장이 이 시간에 업무지시를 한다는 말은 오늘까지 완료하라는 의미임을 알지만 모르는 척하고 재차 확인을 한다.

"팀장님 이거 언제까지 완료하면 될까요?"

"응. 최대한 빨리~"

이런 애매한 답변이 짜증 나지만 어쩔 수 없다. 초과근무를 신청하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오늘 야근해야 할 거 같아. ㅠ 오늘 저녁 약속은 못 지키겠다. 미안해. ㅠㅠ'

메시지 보내기가 무섭게 핸드폰의 진동이 울린다. 발신자는 우리집이다.

"여보세요?"

"아빠 오늘 또 늦어?"

"응. 미안해. 오늘 갑자기 일이 생겨서."

"오늘 저녁밥 같이 먹기로 했잖아. 아빠 나빠. 미워!"

첫째가 이내 아쉬운 마음에 약속을 못 지킨 아빠에게 앙탈을 린다. 둘째, 셋째도 멀치감치 에서 한몫 거둔다.

"아빠 미워! 나빠!"

그들이 아빠에게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심한  던진다. 저녁 7시까지 집에 가겠다던 이렇게 오늘도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팀장님 먼저 가보겠습니다."

". 그래 수고했어."

대답은 쿨하지만 뒤통수가 뜨겁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나왔다. 나의 퇴근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불편한 나의 뒷모습이 계속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인사를 한이상 미련을 두면 안 된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기 전에 호기롭게 사무실 문을 박찬다. 퇴근시간에는 오로지 전진만 있을 뿐이다.

회사 건물을 나오고 지하철로 가는 길, 계속 책상에 앉아있는 팀장 모습과 사무실 풍경이 머릿속에 맴돈다. 딱히 특별한 일도 있는 것도 아닌데 책상을 잘 잠그고 나왔는지, 중요한 문서가 책상 위에 올러져 있지 않은지, 제출한 보고서에 오탈자가 없는지, 팀장이 지시한 업무 중 혹시나 잊은 업무가 없는지, 온갖 것들이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런 걸 보면 직장인이라는 가면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다. 9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회사에서 보냈으니 어쩌면 이런 잔상들이 당연할 수도 있다. 확실한 건 직장인 가면이 쉽사리 벗겨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면을 벗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지하철의 퇴근시간은 가면을 벗는 시간이다. 하지만 쉽지가 않다. 좀처럼 벗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인이라는 망령이 현세를 떠나지 못하는 거 마냥 주위를 계속 맴돈다. 나의 마음과 머리는 아직 그곳에 머물고 있으니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마치 내가 회사를 떠나지 못하는 망령 같다.

망령을 쫓기 위해 귀에 이어폰을 꼽고 책을 펼친다. 이들의 도움으로 퇴근 시간은 완충의 시간으로 점점 변모한다. 만차가 된 지하철 안에서 사람에 치여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지만 이 마저도 소중하다. 몸을 가누기 힘든 대신 마음을 가누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지하철 퇴근 시간은 '직장인 나''진짜 '가 화해하는 시간이다. 이렇게 소중하고도 꼭 필요한 시간을, 나는 '가면을 벗는 시간'이라 부른다.


직장인이라는 가면을 벗는데 나는 30분 정도 걸린다. 삼십 분이라는 시간 동안 직장인 가면을 벗기 위한 마음 부림은 처절하고도 필사적이다. 주어진 가면에 반항하는 최소한의 발악이라고나 할까. 가면에 반항한다고 해서 가면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가면 또한 나의 다양한 모습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가면이 있어야지 내 삶이 움직이고 유지된다. 가면은 인생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사회적 역할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가면이 나를 표현할 수는 없다. 가면을 벗은 맨 얼굴만이 진짜 나를 표현할 수 있으리라. 지하철에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이 순간이 출퇴근길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음악을 듣거나 책을 본다던지 어느 정도의 인풋으로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길 기다린다. 그런 다음 글쓰기 어플을 연다. '직장인으로서의 나'가 아닌, '아빠''남편' 아닌 '진짜 내'가 생각하는 것과 마음을 글로 정리하고 표현함으로써 진짜 나를 만날 수 있다.

진짜 나를 찾는다는 건 내가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지금의 모습이 거짓된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고 거짓된 모습을 벗어던지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쾌락을 좇는 것이 아닌 고통을 제거해 마음의 불안감을 없애는 것이 목적인 거처럼 말이다.

솔직히 진짜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가짜는 확실하다. 확실한 가짜를 하나하나 벗겨내다 보면 진짜가 나오지 않을까? 이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짜를 찾기 위한 노력은 멈추지 않는다. 이 노력만은 진짜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마법 같은 시간이 찾아온다. 출퇴근러들의 비호 아래 이리 치이고 지리 치이는 지하철 안에서 머리가 띵한 짜릿함이 느껴지는 순간. 퇴근 시간이 자유의 시간으로 변하는 순간이고 하루 중 가장 감동적인 시간으로 승화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주어진 두 시간이라는 퇴근 시간이 하루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말인데 퇴근 시간이 조금 더 길어도 괜찮다는 엄한 생각이 들기도 하니 나란 사람은 참으로 간사하다. 집에서 오매불망 나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가만두지 않을 터 이쯤에서 그만두자.




지하철에서 나와 집으로 가기 위해 시동을 건다. 동시에 핸드폰을 들고 우리집 전화번호를 누른다.

"아빠 어디야?"

". 이제 지하철에서 나왔어. 차 타고 올라가."

"와! 아빠 빨리 와. 올 때 맛있는 거 사와!"

이제부터 집 현관문까지는 벗었던 가면을 다시 쓰는 시간이다. 또 다른 가면 아빠라는 가면과 남편이라는 가면이 기다리고 있다. 회사에서는 직장인이라는 하나의 가면에만 집중하면 되지만 집에서는 그렇지 않다. 한 번에 여러 가지를 잘 못하는 나는 집에서 네 명의  여자에게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가면들이 있어 다행이다. 사랑하는 가면을 잘 쓰기 위해서는 퇴근 시간 잘 벗는 게 중요하다.


가면을 쓰고 가장으로써, 직장인으로서 세상살이가 쉽지 않다. 솔직히 이게 가면인지, 어떤 게 진짜 내 모습인지 구분하기도 힘들다. 사람들 틈바귀에 끼여 녹초가 된 몸 하나 가누기도 버겁다. 지하철에서 흔들리는 몸이 내 몸인지, 니 몸인지 모르겠다. 직장에서의 격무와 기나긴 출퇴근으로 나는 없어지는 거 같다. 누구보다 집으로 향하는 퇴근 시간이 버겁고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퇴근시간은 단순히 집으로 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에게로 향하는 시간임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니 이건 발악이다. 가면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진짜 나를 지키기 위한 발악. 그러다 보면 언젠가 진짜 나의 모습과 마주할 날이 오겠지. 그날을 위해 오늘도 출퇴근 시간을 선용한다.

힘들지만, 기나긴 퇴근 시간이 반가운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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