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폭풍속 부푼돛 Nov 30. 2021

8호선, 그 남자의 목소리

마음 가장 밑바닥, 고통의 존중

유연근무를 해도 퇴근시간은 아침처럼 여유롭지가 못하다. 5시 칼퇴는 언감생심이다. 퇴근시간은 어영부영하다 보면 저녁 6시 이후 러시 아워에 맞물리게 된다. 지하철에서 나름대로의 명당을 찾아 자리를 잡아본다. 이어폰을 꼽고 책을 펼쳐 보지만 밀려오는 인파로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말 그대로 지하철 안은 콩나물시루 단지안이다. 환승역에서 정차한 지하철의 자동문이 열리면 썰물이 빠지듯 지하철 바닥이 드러난다. 동시에 밀물이 밀려와 또 다시 콩나물시루 단지안이 된다. 이 과정에서 타는 자와 내리는 자들, 각자의 노력은 과격한 분투로 바뀐다. 직장에서 릴대로 털리고 다 소진되었다고 생각했던 에너지가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마지막 에너지를 모으고 모아  퇴근러들은 마지막 원기옥을 지하철에서 불태운다. 설상가상으로 옆사람 발이나 밟지나 않을까 불필요한 신체접촉이 있지나 않을까, 내 몸 하나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살얼음 판 걷듯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한다. 지하철 퇴근시간은 고통의 연속이다. 하루가 파하는 지금도 이렇게 개고생을 하다니... 더 끔찍한 사실은 내일도 모레도 계속한다는 사실이다.  끔찍하게 반복되는 일상은 언제쯤 끝이 나는 것일까? 팀장이 항상 얘기하듯 진짜 죽어야만 끝나는 것인가? 죽어야 끝나는 일상을 반복하는, 지하철 차창에 비친 나의 모습이 그렇게도 딱하고 처량할 수가 없다. 나는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보다 무엇 하나 낫다고 할 수 있는가? 희망 하나 보이지 않는 이런  모습이 나의 진정한 모습일까? 사람들 사이에 밀리고 밀리면서 이런저런 생각과  천호역에 다다른다.




천호역에 환승한 8호선은 5호선에 비하면 확실히 여유롭다. 그제야 퇴근의 여유로움을 조금 느낄 수 있다. 전쟁터와 같았던 5호선에의 긴장감을 8호선에서 잠시 내려놓는다.

퇴근러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각자의 집으로 향하고 있다.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연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표정은 밝지가 못하다. 하루의 고단함과 수고로움에 짓눌려 그 무거움을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덜어내고 있다. 나 역시 음악의 볼륨을 높이고 책에 집중을 한다. 관계로 얽힌 사회적 역할을 잠시나마 내려놓는다. 관계의 단절을 통해 나만의 세계로 빠져본다. 잠시 동안이지만 나의 진짜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한 껏 부풀어 있다. 이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기 싫은 나만의 시간이다.


이어폰 너머에서 뭉개진 방송용 남자의 목소리 웅웅 들린다. 평소 같으면 정차역을 알리는 컴퓨터 여성 목소리나 기관사의 짧은 멘트만 나올 뿐인데 뭔가 얘기가 길어지는 듯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이어폰을 빼고 귀를 기울였다.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고단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정말로 지금 이 시간까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회사 업무로 인해 많이 지치고 피곤하시겠지만, 건강은 꼭 챙기시길 바랍니다.  밤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집에 도착하실 때까지 조심하셔서 안전하게 귀가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평소에는 듣기 힘들었던 기관사의 멘트를 듣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올라왔다. 이것은 나의 입에 미소를 전달하고 눈가에 촉촉함을 선사했다. 건조하고 황무지 같은 나의 마음에 한줄기의 단비와도 같았다. 나의 지친 마음을 누군가 위로해준다는 사실도 감동적이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의  뜻밖의 선물이어서 그 감동은 배가 되었다. 사랑에 빠져 마법의 시간을 보내는 젊은 두 남녀에게는 그저 오글거리는 멘트로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팀장에게 까이고 팀 담당자와 한바탕 하고 후배 직원의 탐탁지 않은 눈초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총체적 난국에서, 오늘도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는 일상의 고통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난리야?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세상살이가 다 그런 거지. 너 혼자 유별나게 그러지 마."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보고 내가 저렇게 말했을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개인의 고통을 희생하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를. 나라는 우주가 느끼는 고통은 가장 단순하고도 사소한 감정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티끌 같은 가시도 나라는 거대한 우주 고통을 줄 수 있다. 이렇게 쉽게 느끼고 불편을 주는 고통이라는 감정이기 때문에 애써 외면하고 회피하려고만 다. 안 좋은 것이라 치부하며 고통의 존재를 부인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통이라는 감정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라리는 얘기한다. 고통을 느끼는 무언가는 실제로 존재하며 고통을 느끼지 않는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고. 고통이란 실재와 허상을 구분짓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감정이다. 가장 단순하기 때문에  솔직하고 진짜가 될 수 있다. 솔직한 진짜 감정을 애써 부정하고 외면한다는 것은 나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며 외면이 아니겠는가.

내가 느끼고통을 직시하고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수고했다' 라는 한마디는 마음 가장 밑바닥에 깔린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될 수가 있다.


마음의 가장 밑바탕에 깔린 감정에 대한 존중은 또 다른 감정으로의 기회이기도 하다. 고통이라는 진흙탕 속에서도 행복이라는 진주를 찾을 수 있다.

순간순간이 신나고  매일이 기쁜 사람과 순간순간이 고통스럽고 매일이 슬픈 사람 중 누가 더 행복감을 잘 느낄 수 있을까? 나는 매일이 고통스럽고 슬픈 사람이 좀 더 밀도 있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꽃밭 속에서의 한송이 꽃은 그냥 비슷한 꽃들 중 한송이의 꽃일 뿐이다. 그 꽃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황무지에서의 한 송이 꽃은 세상의 모든 가치가 부여된 가장 감동스러운 한송이의 꽃이 될 수 있다. 고단하고 지친 퇴근길에 갑자기 들린 그 남자의 목소리는 황무지에서 고개를 든 꽃 한 송이였다.


항상 행복한 사람은 감동적일 수 없다. 항상 불행한 사람만이 감동적일 수 있다. 듣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보고 있던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자. 그리고 주위를 살펴보자. 가장 가까운 곳에 꽃 한 송이가 활짝 피어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서로가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 되리라 믿는다.

이전 09화 출퇴근 시간은 길면 길수록 좋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