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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May 11. 2021

"나는 무신론자다 하지만"...

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belief/2009/jul/16/daniel-dennett-belief-atheism

대니얼 데닛 (Daniel Dennett, 1942~)

* 본 포스팅은 2009년에 철학자 데닛이 <가디언> 지에 기고한 짧은 칼럼을 직접 번역한 글이다.



우리는 신이라는 신화를 더 이상 보존해서는 안 된다. – 그것은 한때 유용한 목발이었으나, 지금 우리는 그것을 한참 뛰어넘었다.


질문: 우리는 믿음을 믿어야 하는가?(Should we believe in belief?)


 내가 주문을 깨다(Breaking the Spell)에서 제목으로 설정해 설명했다시피, “믿음에 대한 믿음”(belief in bellif)은 종교에만 국한되지 않은 흔한 현상이다. 경제학자들은 건전한 통화(a sound currency)는 통화가 건전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의존한다는 것을 깨닫고, 과학자들은 사람들이 객관성에 대해 믿지 않는다면 지구 온난화에 대한 과학적 연구들의 실제적 객관성이 정치적으로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경제학자들과 과학자들 (다른 영역 안에서도) 양성(benign)이라고 생각하는 믿음들을 육성하고 보호하려는 데 조치를 취한다.


 그것은 믿음에 대한 믿음에 따라 행동한다. 때때로 믿음의 유지는 너무나 중요하게 여겨져서 프로파간다의 인상적인 시스템들은 사회가 지지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믿음을 실제로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지고 활발하게 옹호된다. 예를 들어, 얼간이 군주들은 널리 퍼진 망각과 기만의 모의(conspiracy)에 의해 그들의 왕좌를 쭉 유지해왔다. 모두가 의심하는 바로 그것: ‘그 왕은 바보다’를 대중들에게 사실임을 보여주는 것이 너무나 사회적으로 지장이 있다고 여겨질 때 말이다.


출처: https://crossexamined.org/stuff-atheists-say-believing-in-god-is-like-believing-in-santa/


 종교는 이것의 극단적인 사례를 제공한다. 오늘날 우리 강경한 무신론자들에 대조적으로 배열된 가장 고집스러운 힘들은 “나는 무신론자다 하지만” 대중이다. 그들은 사적으로는 우리가 맞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공적으로는 우리의 “적대”, 우리의 “무례함”(실제로는 그저 솔직한)을 개탄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신을 믿지는 않지만, 확실히 신에 대한 믿음을 믿긴 한다. 누가 그저 믿음을 믿는 사람일 뿐인가에 대해 구별하는 것은 언제나 쉬운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믿음에 따라서(by believing in belief) (실제로는 신을 믿지 않으면서) 동기화된 행동들은 - 소토 보체(sotto voce; 소리를 낮추어 하는) 고해성사들을 제외하고는 – 진심 어린 신자들의 행위로부터 거의 식별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십일조를 내고, 충성을 맹세하고, 교회 프로젝트를 위해 봉사하고, 기타 등등.) 때때로 나는 심지어 그들의 신에 대한 믿음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 10%만이 실제로 신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나는 특히 가장 앞장 서서 주장하는 이들을 별로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과도한 활동으로써 그들이 종교에 대한 침식이 주는 효과는 무엇이든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리고 그들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침식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있다. 그들이 종교적 언약들에 대해 더욱 자신감 있고 안심해 한다면, 그들은 아마도 소수의 무신론자들의 신임을 떨어뜨리고자 하는 데 그렇게까지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들은 달 착륙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자신하기 때문에, 그들은 인터넷상에 도사리고 있는 달 착륙 회의론자들의 신임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데 신경쓰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이 미디어와 정부에 대한 진실성에 있어서 공적인 신뢰를 위협하는 문제 제기를 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믿음을 믿는 그들이 틀렸다고 자신한다. 즉, 우리는 신에 대한 신화를 보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통화가 건전하게 유지되도록 하는 금본위제에 대한 집착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한 요구를 하며 신에 대한 신화를 공정하며 안정적인 사회를 위해 보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때 유용한 목발이었으나, 지금 우리는 그것을 한참 뛰어넘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덴마크는 가장 제정신이고, 건강하며, 행복하고, 범죄로부터 상당히 해방된 나라다. 그리고 대체로 덴마크 사람들은 신에 대한 이슈를 간단하게 무시해버린다. 우리는 믿음에 대해 믿고 있는 그들이 틀렸음을 확실히 희망해야 한다. 믿음은 빠르게 차츰 줄어들고, 그 버팀목들은 찌그러지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 있는 복음주의자들의 국내 연구는 오직 그들 중에서 4%의 아동들만이 “성경을-믿는”(Bible-believing) 어른으로 자라난다고 예측한다. 남쪽 지역의 세례자들은 오늘날의 절반이었던 1950년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다. 어느 시점에 단지 믿음을 믿는 사람들이 수건을 던지고(포기하고) 그들의 아이들과 이웃들이 그들 스스로는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그것에 매달리도록 하는 짓을 그만두도록 해야 할까? 지금이 딱 좋지 않을까?(How about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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