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차
"네가 선을 행했고, 다른 사람이 너의 그 선행으로 유익을 얻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도 왜 너는 어리석은 자들처럼 사람들이 너의 선행을 인정해 주거나 어떤 보답을 해주는 것 같은 다른 무엇을 바라는 것이냐."
- <명상록>, 제 7권 73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저, 박문재 옮김, 현대지성, 2018, pp.149-150 -
"何以故? 若菩萨不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하이고? 약보살 불주상보시 기복덕불가사량)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으리라.
-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묘행무주분 제4(妙行无住分 第四), 도올 김용옥 편역, 통나무, 2019, p.197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당신이 선행을 할 때 사람들의 인정과 보답을 바라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렇게 조언한 이유는 무엇일까? 책의 다른 구절들을 살펴보더라도 딱히 별다른 근거는 없어 보인다. 단지 그렇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마땅할 뿐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포도나무가 때가 되면 또다시 새롭게 포도송이들을 맺듯이" 그 이상 아무런 요구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덧붙여서 우리는 모두 이성을 가진 자연의 일부이므로 누군가를 돕는 것은 곧 나를 돕는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식으로 선행을 옹호할 수도 있다. 이때 선행을 베푸는 자는 그 자신의 자아(ego)가 세계 시민 전체로 확장된 셈이다. 가히 성인(聖人)의 경지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정말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경우는 이러한 성인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한다.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타인을 나누는 분별적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행을 베풀 때 인정과 보답을 바라지 말아야 할 현실적인 이유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이유는 굳이 성인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이 아니더라도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마저 동의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그 이유를 말하기에 앞서 관련 아이디어를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통해 얻게 되었음을 밝혀둔다.
우리는 <금강경>에 나오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개념이 마르쿠스가 말하는 선행 개념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무주상보시란 쉽게 말해서 누군가를 도와주고도 티를 내지 않는다는 뜻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기독교 신약성서인 마태복음에서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마 6:3)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선행을 할 때 무언가에 집착하거나 바라는 마음 없이 행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따른 과보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해봐도 그렇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조언을 구한다고 하면 그 상대방은 꼭 내 조언대로 따라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 조언을 받아들일지 말지에 대한 최종 책임은 상대방에게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한테 선물을 했다고 하면 그 상대방은 꼭 선물을 써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운이 나쁘게도 그가 원하는 선물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 우리들은 상대방은 꼭 어떠한 방식으로 행동해야만 한다는 상(相)에 사로잡혀서 그에 부응하지 않을 때 실망하고야 만다. 본인 딴에는 착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도왔다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여전히 수행이 덜 된 마음이다. 애당초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본전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 상태에서 상대방이 어쩌다 나를 기분 좋게 할만한 행동을 했다면 나는 이미 기대를 놓아버렸기 때문에 기쁘다. 설령 상대방이 기분 좋게 할만한 행동을 하지 않을지라도 바라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실망도 없다. 이러나 저러나 과업이 돌아오지 않기에 괜찮은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풀 때는 선뜻 열린 마음으로 내어주어야 한다. 적어도 선행을 베풀기로 결심했다면 무언가를 크게 바라는 마음 없이 선뜻 열린 마음으로 내어주어야 한다.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과업도 돌아오지 않기 마련이다. 과업이 돌아오지 않으니 윤회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복덕(其福德不可思量)이다. 이러한 복덕이야말로 복이라 이름 붙일 것이 없는 무루복인 것이다. 이때 비로소 세상에 끌려다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주인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내 생각에는 마르쿠스 역시 이러한 동기의 선행에 어느 정도 동의하리라 본다. 내 삶의 주인된 사람이라면 잘 자란 포도나무를 바라보며 그 자체로 기뻐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포도나무에 얽매여서 키워준 값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 삶의 주인된 사람이라면 인정과 보답을 바라지 않고 선행을 베풀 것이다.
* 해당 게시물은 필로어스의 프로그램 일부 지원을 받고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