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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Nov 18. 2021

[필로어스 '위대한 질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4일차


Q. 왜 '고통(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판단, 즉 '내부'에서 오는 것일까요?


"오늘 나는 나를 괴롭히는 온갖 것들에서 벗어났다. 아니, 그것들을 던져 버렸다. 그것들은 외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즉 내 자신의 판단에 있었기 때문이다."

- <명상록>, 제 9권 13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저, 박문재 옮김, 현대지성, 2018, p.178 -


"판단을 하지 말라. 그러면 네가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 생각이 사라지면, 피해도 사라질 것이다."

- <명상록>, 제 4권 7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저, 박문재 옮김, 현대지성, 2018, p.71 -


 아마도 위 구절에서 마르쿠스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판단을 아예 그만두라는 말이 아닐 것이다. 감정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우리의 판단이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러한 사실을 지지하는 과학적 증거는 예전부터 많이 나타났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최면 실험이나 플라시보 효과가 이를 입증한다. 전부까지는 아니어도 고통을 포함한 부정적인 감정을 우리 스스로 어느 정도 제어가능하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흔히 사람들이 부정적인 감정을 겪는다는 것은 뇌가 특정한 경험을 두고 부정적이라고 판단한 결과다. 무언가 부정적인 사건이 먼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뇌가 부정적인 감정을 투사해서 판단한 것일 뿐이다. 물론 이는 진화의 역사 속에서 생존과 번식을 위해 형성된 자연스러운 뇌의 기능이다. 생존과 번식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돌멩이에게는 긍정적인 감정도 없고 부정적인 감정도 없다. 반면에 뇌를 가진 우리들은 왜 이러한 방식으로 감정을 겪는 것일까?



 뇌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동적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신체 예산(body budget)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일이다. 즉, 뇌의 핵심적인 기능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 에너지가 언제 얼마나 필요할지 예측함으로써 효율적으로 몸을 움직이도록 제어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 하에서는 우리의 뇌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것만큼 비효율적인 일처리도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이와 관련해서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쓰인 다음 구절들을 참고해보자.



"만약 당신의 뇌가 그저 반응만 한다면, 이것은 당신의 생명을 유지하기에 너무 비효율적일 것이다. 당신은 늘 대량의 감각 입력에 노출되어 있다. 깨어 있는 매순간 1개의 인간 망막은 부하가 잔뜩 걸린 1개 전산망 연결과 맞먹는 양의 시각 데이터를 전송한다. 이제 거기에 당신이 갖고 있는 모든 감각 경로의 수를 곱해보라. 당신의 이웃들이 한꺼번에 넷플릭스Netflix에 접속해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를 너무 많이 받으면 인터넷 연결이 심하게 정체되는 것처럼 반응성 뇌에서도 똑같은 일이 발생할 것이다. 또한 반응성 뇌는 너무 낭비일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대사를 통해 부양하기 벅찰 만큼 많은 상호 연결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리사 펠드먼 배럿, 생각연구소, 2017, pp.131-132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태는, 예컨대 당신의 발 옆으로 뱀이 스르르 지나가는 것은 당신의 예측을 그저 조율할 뿐이다. 이것은 당신의 호흡이 운동을 통해 조율되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 당신이 이 단어들을 읽으면서 그 의미를 이해하는 순간, 각 단어가 당신의 뇌에서 대량으로 발생하는 내인성 활동에 일으키는 교란 작용은 작은 조약돌 한 개가 바다의 굽이치는 파도에 부딪쳐 튀어나오듯 매우 미미한 것이다."

-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리사 펠드먼 배럿, 생각연구소, 2017, p.132 -



 우리는 매순간 뇌의 예측을 통해 스스로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외부의 감각 입력은 "작은 조약돌 한 개가 바다의 굽이치는 파도에 부딪쳐 튀어나오듯 매우 미미한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입장을 보면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그리 과장된 주장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이에 대해 들 수 있는 사례또한 무궁무진하게 많다. 단언컨대 나는 이 주제 하나만으로도 밤을 새서 이야기할 수 있다. 허나 쓸데없이 글이 길어지면 쓰는 사람도 지칠 뿐더러 읽는 사람의 의욕도 떨어뜨릴 뿐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간단한 사례 하나만 툭 던지면서 읽는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다양한 예시를 떠올려보도록 하겠다. 특히 많은 이들이 관심있어 할만한 가장 원초적인 감정 중 하나인 성적 쾌감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우리는 종종 비슷한 물리적 자극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자극에 대해서는 짜릿한 성적 쾌감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자극에 대해서는 불쾌한 감정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심지어 동일한 사람에 대해 느꼈던 성적 쾌감마저도 단 하룻밤 사이에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연인으로 지내고 있는 상대방이 바람이라도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과연 나는 이후에 어루만져주는 그의 손길에서 어제와 같은 만족을 경험할 수 있을까? 달라졌다면 왜 그러한 것일까? 적어도 그의 신체와 정신은 어제에 비해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성관계를 할 때 그가 갖춘 테크닉마저도 똑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뀐 것은 그에 대한 나의 판단일 뿐이다. 그에 대한 판단이 바뀌어졌기에 그에 대해 느낄 수 있었던 성적 쾌감마저도 하룻밤 사이에 사그라들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어제 먹던 음식, 어제 읽은 책, 어제 감상한 예술 작품 등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다. 즉, 고통을 포함한 모든 감정들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 해당 게시물은 필로어스의 프로그램 일부 지원을 받고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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