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차
"네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은 짧다. 산 위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가라. 사람이 우주라는 국가의 시민으로 살아가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여기에서 살든 저기에서 살든, 그가 살아가는 장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너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자연(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의 예로 너를 꼽을 수 있게 하라. 사람들이 너를 용납할 수 없다면, 너를 죽이게 하라. 그들처럼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 <명상록>, 제 10권 15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저, 박문재 옮김, 현대지성, 2018, p.199 -
"마치 수천 년을 살 것처럼 살아가지 말라. 와야 할 것이 이미 너를 향해 오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선한 자가 되라."
- <명상록>, 제 4권 17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저, 박문재 옮김, 현대지성, 2018, p.73 -
"우리는 인생의 많은 것을 놓쳐요
영원히 살듯이 착각도 하고요
인생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아요
눈이 부시도록 살아요
너의 오늘을요"
- 심규선, <우리는 언젠가 틀림없이 죽어요> 中 -
우리는 현실이라는 독특한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꿈으로부터 벗어난 초월적인 세계로 떠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하는 이들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애당초 그러한 초월적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너무나 불확실한데도 말이다. <원각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헛것인 줄 알았으면 곧 떠나라. 헛것을 떠나면 그것이 곧 해탈이다." 나는 이 구절을 '헛것'을 넘어선 순수한 기원에 대한 집착마저도 버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예로부터 선지식들이 흔히 말씀하신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꿈은 그저 꿈일 뿐'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자각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정신 사나운 꿈을 꾸었다 할지라도 꿈은 그저 꿈일 뿐이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현실이라는 독특한 꿈을 꿀지라도 '꿈은 그저 꿈일 뿐'이라고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깨달음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마르쿠스가 말한 "자연(본성)에 따르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본디 자연에는 그 어떠한 긍정도 부정도 없이 그저 초연함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늘 이야기하듯이, 생존과 번식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돌멩이에게는 그 어떠한 긍정적인 감정도 부정적인 감정도 진화할 수 없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그런데 막상 이러한 깨달음을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아보인다. 여전히 현실의 기복에 따라서 내 마음은 쉽게 휘둘리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깨달음이라는 녀석은 저 멀리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 간격을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바로 이때 마르쿠스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마치 수천 년을 살 것처럼 살아가지 말라. 와야 할 것이 이미 너를 향해 오고 있다." 라틴어 격언에도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비슷하게 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큼 삶이 무상해지는 때가 없기 때문이리라. 죽음이라는 높은 산 위에서 나 자신을 보고 있노라면, 그동안에 내 마음을 어지럽혔던 좋고 싫은 감정들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할지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꿈은 그저 꿈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해당 게시물은 필로어스의 프로그램 일부 지원을 받고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