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영화] <생일> "잊지 않겠다"는 다짐마저 희미해질 때...
영화 <생일>의 언론 시사였던 지난 18일 서울 용산의 한 극장에선 여기저기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기자와 배급 관계자를 대상으로 개봉 전 진행하는 이 행사에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인 만큼 단순한 재미와 감정적으로 영화를 대하려고 하진 않기 때문.
영화가 다루고 있는 세월호 참사, 홀로 떠나 버린 아이들을 위해 남겨진 사람들이 마련한 생일 파티라는 소재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감정적인 무장해제가 된 걸까. 배우 설경구와 전도연을 바라보면서 영화 중후반부터 터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가릴 수 없는 아픔을 바라보다
▲영화 <생일>의 한 장면ⓒ NEW 제공
알려진 대로 <생일>은 5년 전 4월 16일 그 참사를 극화한 최초의 상업영화다. 소재의 무거움, 아직 규명되지 않은 진실과 사안의 엄중함, 그리고 결코 쉽게 치유될 수 없는 유가족의 상처 등. 이 영화가 기획될 당시 이런 이유들로 우려하는 시선, 비판하는 시선이 있었다. 이종언 감독과 제작진이 유가족을 만나 설득하고 취지를 설명하기도 했지만, 당시 유가족 대책위 유경근 공동대표는 SNS상에 강한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생일> 제작진 입장에선 진정성으로 호소할 수밖에 없었을 터. 당시 관련 논란을 취재하던 언론사에도 영화사 측은 최대한 입장 표명을 자제하며 만듦새에 집중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렇게 정일(설경구)과 순남(전도연) 그리고 아들 수호와 동생 예솔(김보민)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영화는 2014년 4월 16일 불의의 사고를 당한 아들 수호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아들을 떠나보낸 후 미처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한 채 사는 순남은 영화에서 내내 언제 터질지 모를 감정의 압력으로 가득 차 있다. 베트남에서 일하는 바람에 아들의 곁을 지키지 못했던 정일은 순남에겐 마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처럼 쉽게 어떤 말을 건넬 수 없다.
아들의 부재 이후 재회한 이 부부, 그리고 오빠를 잃은 뒤 엄마의 상처를 느끼다가 너무도 일찍 철이 들어버린 예솔의 모습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여느 극영화였다면 사건을 전개시키기 위한 배경 설명으로 끝나 버렸을 이들의 상황이 사실 <생일>이 그리고자 했던, 표현하고자 했던 전부였다. 큰 갈등이라면 정일과 순남의 내적 거리와 더불어 유가족을 위해 사망한 이의 생일을 함께 챙겨주는 모임에 대한 순남의 불신 정도다.
극영화로 구분할 수 있지만 <생일>이 담고 있는 인물과 상황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 참사에 함께 울고 아파했던 이웃 중 누군가는 "이제 그만하라"며 원망하는 사람이 되었고, 유가족 모임 중에서도 누군가는 정부의 합의금을 받아갔다는 말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도 있다. 그러니까 사고로부터 5년이 지나는 시점까지 그 시간의 흐름을 축으로 삼고 <생일>은 나와 너, 우리가 어떤 심리적 변화를 겪어 왔는지를 담담히 묘사하고 있다.
국민적 트라우마
▲영화 <생일>의 한 장면ⓒ NEW 제공
너무도 담담해서 때론 건조해서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실제로 참사 1년 후 이종언 감독은 안산 치유공간 '이웃'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함께 슬퍼하고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왔다.
"참사 당시 여러 집에서 곡소리가 났다고 한다. 유가족 분들도 계시지만, 그 분들의 이웃도 있다. 그 사건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표현하고 싶었다." (이종언 감독)
이창동 감독의 <밀양>, <시>의 연출부였던 이종언 감독은 단편 <봄>, 다큐멘터리 <친구들: 숨어있는 슬픔> 등을 만들며 세상과 소통 중이었다. 그러던 그에게도 세월호 참사는 중요한 삶의 분기점이 됐을 터. 그 역시 <생일>에 얽힌 비판과 우려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영화는 감독 스스로가 몸으로 겪고, 체화했던 사건을 차근차근 두드려가며 표현하려 한 흔적이 짙게 묻어 있다.
배우들 역시 기능적으로 캐릭터에 접근하지 않고, 사회적 맥락 안에서 고민하려 했다고 한다. "그날 이후 시인은 시를 썼고, 소설가는 소설을 썼으며, 가수는 추모 노래 만들었는데 배우로서 난 뭘 했을까 되물었다"던 설경구는 애초에 본인이 참여할 수 없던 일정이었는데도 시나리오를 보고 일정을 바꿔 <생일>에 출연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오히려 반대로 참사의 슬픔이 너무 커서 고사했던 전도연은 생각을 바꿨다. 남순 역을 하면서 "징검다리 건너듯 두드려 가며 내 감정이 남순의 상황에 앞서 가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했다"고 말한 바 있다.
분명 극영화지만 <생일>은 오히려 어떤 다큐멘터리 못지 않은 사실성과 사회적 함의를 품고 있다. 영화 속 이야기는 대부분 실제에서 따온 것. 설정 역시 실제 해당 아이와 유가족의 사연을 대부분 차용했다.
엄마라는 호칭이 아닌 엄마의 이름을 불렀던 한 아이는 아침밥에 국을 꼭 챙겨먹었고, 우유를 그렇게 많이 마셨다고 한다. 184cm의 큰 키, 패션 감각이 남달랐고 공부보단 친구들과 축구하는 걸 훨씬 좋아했다. 일찍 여읜 아버지를 대신해 자신이 그 역할을 하겠다고 호언하며 운전면허증을 빨리 따서 엄마와 어린 여동생과 함께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영화 <생일>의 한 장면ⓒ NEW 제공
영화 <생일>은 그렇게 실제 순남씨와 그의 가족의 흔적이 오롯이 깊은 곳에 새겨져 있었다. 한 시인은 이 가족의 사연을 시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아무도 없는 밤/ 현관 센서 등이 반짝 켜진 적 있다죠/ 제가 다녀간 거예요/ 어머니 이제 거실에서 쪽잠 자지 마세요/ 보고 싶을 때 제가 그리로 갈게요/ 울지 마세요/ 나의 사랑/ 나의 그리움/ 우리들의 시간은 다 꽃이었어요 ' - 이규리 시인
그 어떤 영화보다도 비극적이었던 그날, 그리고 5년. 압축된 이야기인 영화와 달리 유가족들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몰아치는 감정적 폭풍, 정부와 당국의 미흡한 대처를 참아야 했다. 함께 슬퍼 했던 많은 국민들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이 '국가적 트라우마'를 두고 감독과 제작진은 그것을 세밀하게 그리고 세심하게 충분히 소화해내며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생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 눈물이 나지만 그 눈물 속 감정의 정체는 큰 슬픔이 아닌 "그럼에도 잊지 않겠다"는 특별한 다짐으로 느껴진다.
참고로 <생일> 언론 시사 당일이었던 18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을 지키던 세월호 천막이 철거됐다. 곧 '기억·안전 전시공간'이 들어설 자리를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유가족 및 당사자들이 여전히 지키고 있다.
영화 <생일> 관련 정보
감독 및 각본 : 이종언
출연 : 설경구, 전도연, 김보민
제작 : 나우필름, 영화사레드피터, 파인하우스필름
제공 및 배급 : NEW
크랭크인: 2018년 4월 10일
크랭크업: 2018년 7월 6일
개봉 : 2019년 4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