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제 이방인을 곁들인.. 나야 알베르 카뮈..!
(스포주의)
오늘은 넷플릭스 화제작 흑백요리사, TOP8 경연 주제였던 인생을 요리하라에서 에드워드 리의 비빔밥 멘트를 통해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눠볼까 합니다. 그가 어린 시절 느꼈을 혼란스러움을 이해하기 위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서사를 함께 다룹니다. 각기 다른 시대와 상황에 놓여 혼란스러움을 겪는 두 인물의 서사를 살펴보고, 이들을 통해 정체성이란 무엇인지 또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스포가 있으니 주의 하세요!)
"사실 정체성에 대해서 많이 고생했어요. 저는 비빔인간이에요. 비빔밥처럼 많은 문화가 섞여 있거든요."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이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다는 낯선 격리감에 사로잡힌다.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듯한 이질감과 무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한 명의 이방인이 된 것 같은 이 '기분'은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도 겉도는 분리감의 상태와도 같다. 우리는 해당 분리감을 통해 너무나 자명했던 나라는 존재가 낯설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던가?
뫼르소는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보다 이 무더운 날씨를 뚫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는 성가심에 골치가 썩었다. 장례식에는 어머니의 친구들과 관리소장이 함께했다. 뫼르소는 아무 말없이 어머니를 위해 눈물 흘리는 이들을 보며 순간 섬찟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어떤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이질감 같은 것이었다.
'난 이들에게 벌을 받고 있다. 그런데 죽음은 누구나 겪어야 할 일이다. 과연 우린 죽은 자들을 향해 눈물 흘릴 권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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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문화권이 아닌 외부인을 우리는 흔히 이방인라고 일컫는다. 미국에서 동양인의 외모를 가졌다는 이유로 미국인으로서 살아갈 수 없었던 에드워드 리, 마찬가지로 한국 요리 프로그램에서도 그는 '이균'이라는 한국 이름으로도 불려질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 삶은 이렇다 할 정체성이 주어지지 않은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 미국과 한국, 어느 나라에서도 그의 정체성은 한낱 이방인에 불과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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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는 친구 레몽과의 여행 도중 아랍인 무리와의 다툼에서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다. 한 아랍인을 총으로 쏴 살해한 것인데, 뫼르소는 그를 향해 총을 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답한다.
"태양이 눈부셔서 쐈습니다."
첫 번째 총알은 아랍인이 들고 있던 칼에서 반사된 태양 빛이 눈부셔서 쏘게 되었다. 이후 격발한 4발은 쏘게 된 이유가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이윽고 검사가 일어나 말했다.
"왜 어머니가 죽은 다음날 희극 영화를 봤습니까?",
"왜 어머니가 죽은 다음날 여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죠?",
"왜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죠?"
재판장에선 어느 하나 자신의 깊이(속사정)를 이해하지 못했고 스스로 격리되어 세상에 홀로 존재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느꼈던 그 ‘기분’처럼 말이다. 장내는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했다는 사실보다 대다수가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보이는 한 이방인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다. 그들이 보기에 어머니의 죽음에 눈물 흘리지 않고 한가로이 밀크 커피를 먹는다는 건 다소 상식의 선을 넘어선 이야기일 테니까.
그가 집행받아야 하는 죄목은 더 이상 살인죄가 아니다.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은 죄. 즉, 남들과는 다른 삶,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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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사회에는 다수가 따르는 사회적 통념이 있다. 그것은 다수가 따르는 상식 선에 도덕 법칙과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통념은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불문율과도 같다. 그래서 사회의 암묵적 분위기에 발맞추지 못하는 이를 두고 우린 이방인이라 칭한다. 엇나가고 겉도는 이상한 사람..
어쩌면 우리가 사회적 통념에 이렇다 할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저 관성적으로 따르는 이유 역시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공동체 안에서 겉도는 이방인이 되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로는 세상사람들의 화려한 언변에서 벗어나 나라는 개인의 고유한 목소리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매 순간 세상사람들의 유행에 눈치 보며 편승하는 삶, 그들에게 소속되어 안정감을 느끼는 삶의 대가로 우린 개개인의 고유한 자아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카뮈는 이를 철학적 자살이라 말했고 우리로 하여금 삶에 대한 본래적 태도로의 회심을 촉구했다. 그렇다면 삶에 대한 본래적, 반항적 태도를 갖는 가장 기본, 즉 나라는 인간에 대한 정체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비빔밥은 처음 보면 여러 재료와 색깔을 갖고 있지만 그것들을 섞으면 한 가지 맛을 만들어네요. 저는 비빔밤을 볼 때 그 안에서 제 자신을 봐요. 이것은 제 삶과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반영하죠."
진정한 나의 정체성은 '기분'으로서 우리에게 드러난다. 이 말은 곧 정체성이라는 것이 명확한 가족력, 인종, 학군, 직업군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위와 같은 '기분'은 두 인물이 느낀 '기분'과도 같다. 누구 하나 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스스로 격리되어 분리된 듯한 '이질감', 즉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서 우린 고유한 나만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 한국 그 어느 나라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한 명의 이방인 에드워드처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다수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계획적 살인범이 되어 사형에 처하게 된 또 한 명의 이방인 뫼르소처럼 말이다.
정체성의 혼란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했던 에드워드. 그는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이 무색할 만큼 정체성을 마주하기란 쉽지 않아보인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렇다할 답을 아직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체성이란 아이러니하게도 온전치 못한 자아를 갖고 있는 자에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해 내가 누구인지 여전히 답을 찾는 이에게 그러니까
정체성은 정체성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자에게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