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다루는 또하나의 시선..
ㆍ오늘은 모든 생명의 끝, 죽음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이해에 용이하도록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함께 다룹니다. 죽음이 도사리는 오랑시에서 지금의 우리가 얻어갈 수 있는 인사이트들이 무엇인지 잠시 들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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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북부의 작은 도시 오랑시. 의사 리외는 진찰실을 나서던 중, 층계참 한복판에서 쥐 한 마리를 발견한다. 그 짐승은 멈춰서서 균형을 잡는가 싶더니 이내 리외를 향해 달려오다 또다시 멈춰 섰다. 마침내 비명을 지르며 이리 저리 부딪히고는 그 작은 입으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리외는 직감했다 14세기 유럽을 죽음으로 내 몰았던 페스트(흑사병)의 또다른 시작을.
오랑시는 페스트의 출현 확인 후 시를 격리, 폐쇄 조치 시켰다. 덕분에 리외는, 몸이 좋지 않아 시외 병원에 입원 중인 아내의 소식조차 제대로 전달 받을 새도 없이 페스트를 진단해야했다.
한때는 모두가 존경하던 리외의 모습과는 너무나 상반되리만큼 이제는 모두 그를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와의 대면은 곧 사형을 선고받는 것과 같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페스트가 악화되자 성당과 술집에는 평소보다 많은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죽음 앞에서 제발 자신과 가족만큼은 살려달라 신에게 기도하는 이들과 도취적인 합일만을 즐기며 지금의 무력한 삶으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하는 이들로 넘쳐났다.
이외에도 오랑시에서는 괴상한 민간요법이 페스트를 막아준다는 둥 불어나는 소문만큼 시민들의 공포는 늘어만갔다. 또 사이비 종교나 돈을 벌기 위해 사기를 치는 비열한 인간들도 여기저기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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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가 여러분께 관여하게 된 것은 반성할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신께서 우리의 죄를 심판하고자 하는 것 뿐입니다.”
한 번은 파늘루 신부의 신앙심마저 기우는 하나의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오통 판사 아들의 죽음이었다. 아이는 임상도 거치지 않은 혈청을 투여하기로 결정할 만큼 증세가 좋지 않았다. 이윽고 혈청을 투여하자 아이의 상태가 괜찮아 지는 듯 싶더니 허리를 반대로 말아올리며 몸을 베베 꼬기 시작했다. 사지가 요란하게 뒤틀렸고 아이는 소리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끝끝내 가벼운 숨을 한번 내뱉고는 그대로 죽었다.
리외는 파늘루 신부에게 말했다.
“이 아이에게도 죄가 있습니까? 이 아이도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입니까? 그저 아이에 불과했습니다. 당신이 믿는 신이 이리 극악무도한 신이라면 난 믿지 않을 겁니다. 죽어서도 저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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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죽음이란, 살아있는 어떠한 인간도 직접 겪어본 적 없는 미지의 순간이지만 인간 모두에게 찾아온다는 점에서 필연적이며 누구도 회피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죽음은 느닷없이 다가오는 경우가 참 많은 듯 합니다. 우리에게 죽음이 느닷없는 이유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진리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임에도 살아 있는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죽음이 다가오지 않을 것만 같다는 안일한 착각 때문입니다. 즉, 살아있는 동안 죽음을 최대한 멀리 해야할 외부적 사태로 치부하는 현대인들의 회피적인 태도(불안)에서 이같이 덧없고 느닷없는 죽음이란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죽음이 느닷없는 사태로 다가오기만을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린 이처럼 막막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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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카뮈는 우리에게 연대의식이 필요하다 이야기합니다. 육체는 페스트의 노예가 되어 이리저리 치인다 한들 정신마저 감염되어선 안된다는 것이죠. 각자의 신념과 철학을 가지고 공동체의식을 통해 죽음이 도사리는 현 상황을 타개해 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의식이 결여된 현대인들에겐 이러한 주장이 무책임한 항변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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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연대 의식이 피부로 와닿기 위해선 죽음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죽음을 다르게 다루는 방법. 바로, 하이데거의 죽음으로의 선구입니다. 여기서 죽음으로의 선구는 불안과 기투를 필요로 합니다.
ㆍ기투란 죽음을 미리 앞서가 보는 것. 쉽게말해 죽음을 직시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불안은 대상이 있는 불안과 대상이 없는 불안으로 나뉘는데 대상이 있는 불안은 취업에 대한 불안, 사랑에 대한 불안처럼 특정 상황 속에서 생기는 불안이라면 대상이 없는 불안은 무, 바로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하이데거는 불안을 현존재(인간) 근본 기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근본 기분을 잘 이해하고 마주할 때 비로소 죽음으로부터 나만의 고유한 삶을 찾게된다는 게 그의 논리이죠. 이처럼 죽음 앞으로 나를 내던지는 것을 죽음으로의 선구라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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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죽음은 삶을 무력화하는 외부적 사태가 아니라 생의 연속성을 완결짓는 인간 실존 방식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타자의 죽음을 마주할때, 나 또한 저들처럼 덧없이 사라질 덧없는 존재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건 존재의 가능성을 앗아가는 외부적 사태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나의 실존을 문제 삼게 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죽음이란 생의 의미가 끊어지는 사태가 아닌 생의 의미가 집중되는 하나의 초점이라 말 할 수 있겠습니다.
머지않아 페스트는 잠잠해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오랑시는 평화를 되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리외는 나태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페스트는 서랍장 안, 신발 속, 주머니 안에 늘 남아서 우리가 삶에 대해 교만함을 느끼는 순간 다시 찾아올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는 각자의 몫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생이, 시기를 특정하지 못한 채 부조리하게 끝나버릴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한다면, 과거의 나라는 맥락을 되짚어보며 나의 내면의 깊은 목소리와 공명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될테니까요..!
여러분에게 있어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요? 혹 부담스럽거나 무거운 주제였지는 않은가요? 여러분의 생각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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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에게 있어 삶은 누군가를 기억해주기 위한 일련의 사건들에 불과합니다. 삶과 죽음이 얼마나 의미있느냐 없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않습니다. 그저 나와 관계를 맺어 나의 일부가 된 이들의 삶을 목격하고 기억하려 애쓰는 것이 제 목표인 셈이죠.
또 먼저 떠난 그가 미처 다하지 못한 삶이라는 선물이자 부조리함 자체를 떠안고 이어나가는 것. 누군가에겐 먼저 떠나게 될 나의 삶을 충만한 사랑으로 기억되도록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죽음을 위로하는 글을 쓰고 싶었지만 죽음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이 우리에게 더 필요한 듯 보였고, 그게 어쩌면 진정한 위로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글을 남겨봅니다.
+각 시대별로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천차만별입니다. 지금은 의학 기술의 발달로 죽음과는 거리감이 생겨 그것을 언급하는 것 조차 꺼려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있지만 고대 로마, 중세 수도승 사이에선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을 인사말처럼 혹은 상징처럼 사용하기도 했죠. 죽은 자들을 기억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 이처럼 각 시대와 처한 상황에 따라 우린 죽음을 다르게 다뤄왔습니다. 현대의학에 의해 우리에게서 죽음이 멀어졌다한들 죽음으로부터 교섭 가능한 인간은 없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