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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해설글 (with. 하이데거)

by 철학 개그 연구소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 읽어봤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현실과 동떨어진 동화 속 이야기로만 치부되어 버린 책. 오늘은 앙투안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통해 어른이 되면서 잊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보이는 것(존재자)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존재)에 대한 사유와 더불어 죽음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함께 다룹니다. 기존 글에 비해 내용도 방대하고 난해할 수 있다는 점 미리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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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비행기 조종사이자 이 소설의 화자인 남자는,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하던 중 불의의 엔진 사고로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하게 된다. 사람 한 명 없는 드넓은 사막 한가운데 홀로 고립되어 영락없는 죽음을 앞둔 남자. 그런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어린아이 아니, 어린 왕자였다.

어린 왕자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양 한 마리 그려줘."


얼토당토않은 일을 겪게 되면 감히 거역할 수가 없는 법. 그는 만년필과 종이를 꺼내 들어 그림을 그려보려 했지만 쉬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유인즉, 그가 5살이던 무렵의 일 때문이었다. 하루는 원시림에 관한 책에서 보아뱀이 코끼리를 집어삼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아 보아뱀이 코끼리를 집어삼킨 장면을 그려 어른들에게 보여줬다.


"이건 모자 그림이잖아? 이런 쓸데없는 그림을 그릴 바에 수학이나 역사 공부를 해라. 그게 사는데. 훨씬 도움이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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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대표하는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은 존재의 근원적 탐구에 대해 이렇다 할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그마저도 존재자와 존재를 마치 포괄된 하나의 개념으로 분석해 왔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두고 존재 망실의 역사라 일컫는다.

이해하기 쉽게 정리를 하자면

존재자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 사물, 태양, 강아지 등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바로 존재자이다. 이러한 존재자들의 고유하고 성스러운 성격을 존재라 말한다. 즉, 존재하는 한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은 존재자이며, 존재자의 근원은 존재이다.



왜 뜬금없이 어린 왕자에서 하이데거를 이야기했느냐 하면,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를 한데 묶어 규정해 온 기존 서양 철학의 부작용으로, 현대인들이 존재자 너머의 존재에 대해 바라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치 소설 속 어른들이 모자라는 존재자 너머에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킨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듯이 말이다.

이처럼 보이는 것에만 몰입해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사는 우리에게 하이데거는 그 해결책으로서 존재 물음을 다시 제기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ㆍ 하루는 어린 왕자가 장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우주에서 날아들어온 씨앗 하나가 신비로운 싹을 피웠고 이내 아름다운 장미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허영심 가득한 장미는 어린 왕자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요구를 해댔다.


"저녁이 되면 추우니 유리 덮개를 씌워줘. 이 별은 환경이 너무 안 좋아."


장미의 허영심에 지친 어린 왕자는 끝내 장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자신의 별을 떠나 여러 행성을 여행하게 된다.




ㆍ 자기 별을 떠나 만나게 된 어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이 우주에서 가장 중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주의 모든 별들이 자신의 지배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왕, 자신이 행성에서 가장 잘생기고 옷 잘 입고 멋진 사람이라며 남들의 박수와 호응에만 응답하는 허영쟁이, 이론적 관념에만 사로잡혀 정작 자신의 별에 산과 바다의 존재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지리학자, 술을 마시며 술 마신 다는 사실을 잊으려 하는 모순된 술꾼, 별을 소유해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을 다시 별을 사기 위해 사용하는 사업가를 만나며 어린 왕자는 되뇌인다.



"어른들은 참 이상해."



아무런 의미도, 정해진 방향성도 없이 세계 안에 내던져진 우리는, 평생을 존재에 대한 고뇌와 끊임없이 찾아오는 실존의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게 된다. 이처럼 세상에 내던져졌다는 의미를 ‘피투성’, ‘피투’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간 실존에는 정해진 방향성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하는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 그러니까 자기 이해는 뒤로한 채, 다수의 사고에 편승하며 자기 개성과 고유한 가능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을 떠나 만나게 된 소유(권력, 돈, 명예, 관념)에 집착하는 어른들처럼 말이다. 하이데거는 이와 같이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상실하고 대중과 유행에 편승해 안정을 추구하는 삶을 ‘비본래적 존재양태’라고 일컬으며, 우리로 하여금 본래적 삶으로의 회심을 촉구했다.

그렇다면 본래적 삶(주체적인 삶)은 무엇인가? 아니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우린 그 실마리를 사하라 사막에서 찾을 수 있다. 엔진 사고로 불시착해 죽음을 눈앞에 둔 화자.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나, 바로 어린 왕자였다. 그렇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이 도사리는 땅에서 화자의 무의식이 찾고자 했던 건 권력도 돈도 명예도 아닌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이었다.

(혹자는 이를 희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이데거의 주장은 의외로 간단하다. 죽음을 미리 앞서 나아가 봄으로써 죽음을 직시하고, 군중 속 하나의 인간이 아닌 나라는 개인으로 죽음을 마주할 때, 비로소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삶을 방향성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죽음에로부터 자신을 기투한다고 말하고 본래성(주체적인 삶)을 찾아가는 유일한 실마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죽음에로의 선구를 통해 군중 속 하나의 인간에서 벗어나 나라는 개인으로 죽음을 직시했다면, 우리는 이제 주변 존재자들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ㆍ조종사를 만나기 전에 일이다. 어린 왕자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나있는 길에서 장미꽃 5,000송이가 피어있는 것을 보고 크게 상심한다. 자신의 장미가 우주에 존재하는 유일한 장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어디선가 여우가 나타났다. 어린 왕자가 말했다.


“이리 와 나랑 놀자. 난 지금 너무 슬프거든.”

“그럴 수 없어. 난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길들인다는 게 뭐지?”

“그건 너무 잊혀진 일이지. 길들인다는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네가 날 길들이면 우린 서로를 필요로 하게 돼. 한 아이에 지나지 않던 네가 내게 단하나 뿐인 존재가 되는거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모든 존재자는 서로가 서로를 지시한다. 예를들어 주거공간이라는 성격을 부여한 방이 있다고 했을 때, 이 방 안에 존재하는 존재자들 (못, 망치, 옷걸이, 옷,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지시)한다는 것이다. 망치는 못을 지시하고 못은 옷걸이를 지시한다. 또 옷걸이는 옷을 지시하고 구김없이 정돈된 옷은 인간을 지시한다. 각 존재자는 나와 구별되는 타자의 존재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는 서로를 증명하고 대변해준다. 그래서 지구 별에서 발견한 5000송이의 장미와 어린왕자의 장미가 다른 이유는 함께 통과한 시간이 존재했기 때문인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된 셈이니까.

그러나 관계를 맺는다는 건 필연적으로 다가올 이별의 아픔을 어느정도 감수해야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한정된 시간 속에 주어진 이 삶을 마무리하게 되는 날이 오고야마니까. 그래도 괜찮다.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 길들인 시간을 떠올린다면, 존재자가 드러나지 못하는 어둔 밤하늘 속에서도 그 너머의 어린왕자를 발견할 수 있을테니까.

내 삶이 끝나기 전까지 내 안에 영원히 존재할 ‘나의’ 어린 왕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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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어린왕자, 하이데거 철학의 해설이었습니다. 죽음은 느닷없이 나타나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곤 합니다. 그럴때면 자명한듯 펼쳐진 삶과 존재가 사실은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곤하죠.

(타자의)죽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거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싶었지만 그런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건 이별의 아픔으로 눈물 흘릴 각오정도는 감수해야하는 거니까요. 그러나 이별이 있기에 주어진 시간속 관계를 소중히 다룰 수 있는 거라면. 죽음은 나의 삶을 무력화하는 외부적 사태가 아닌 삶을 다르게 바라보게하는 하나의 초점이 될 것 입니다. 그래서 결국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이는 없다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을 다시한번 깨닫고 나를 위해 또 너를 위해 살아간다면

실존은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사건에도 불구하고 잊지못할 경이를 선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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