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토이스토리가 그저 잊혀진 동심과 순수함을 자극하는 영화로만 보여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분석글을 남깁니다. 다소 난해하고 딱딱한 글이지만 토이스토리를 통해, 우리 삶에 등장하는 불안의 본질을 이해하고 관계의 중요성을 되찾아 불안을 건강하게 해소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1편
카우보이 인형 우디는 주인 앤디에게 있어 소위 최애 장난감이라 할 수 있다. 우디는 집안의 다른 장난감들이 조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돌보고 통솔하는 리더이기도 하다. 그러나 늘 평화롭기만 해 보이는 그들의 일상엔 몇가지 걱정거리가 있다. 바로 앤디가 새 장난감 선물을 받는 날. 이날 앤디가 자신들보다 멋있는 장난감을 선물 받게된다면 더이상 자신을 가지고 놀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은 나라는 존재가 언제든 대체될지 모른다는 ‘대체자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진다.
2편
하루는 앤디가 우디를 가지고 놀다가 팔이 튿어지자 1년에 한번 열리는 카우보이 캠프에 우디를 데려가지 않게된다. 이때, 우디는 장난감이 겪게될 최후를 깨닫게된다. 장난감은 더 나은 대체품이 등장하거나 낡아서 기능을 다하게 될 때 버려지게 된다는 것. 또 주인이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면 더이상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우디가 앤디 곁을 떠나 장난감 박물관에 전시되기를 선택한다면 우디는 대대손손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장난감이 될 것이다. 그것은 주인과 함께할 때 가장 장난감답다는 장난감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지만 다가오는 이별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하다. 결국 앤디와 장난감 친구들을 져버리고 떠나려하지만 버즈가 나타나 더 중요한 가치를 일깨워준다. 어떤 뛰어난 대체품도 서로가 통과해온 시간 속에 만들어진 ‘관계의 중요성’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걸.
사실 장난감들이 겪는 불안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더 나은 대체자가 등장하면 자리에서 밀려날지 모른다는 불안을 품고 살아간다. (우리를 언제든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여기는 회사, 성취로 나를 판단하는 주변인들) 문제는 이 불안을 우디처럼 관계의 가치를 깨닫게 되어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소유하면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대체되지 않으려 대체 될 수 없는 존재가 되기 위해 소유하는, 불안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그에 앞서, 대체에 대한 불안을 소유로 해소하는 소유지향적인 태도의 본질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대체와 기능의 불안은 같은 맥락입니다.)
에리히 프롬의 마지막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 따르면 자본주의에서 인간은 두 방식중 하나를 선택하여 살아간다고 한다. 소유양식과 존재양식. 쉽게 설명해, 소유지향적인 삶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다. 이들은 소유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소유물이 늘어날 수록 자신의 존재가 뚜렷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소유하려 노력한다. 명예, 돈, 직업 성취, 권력, 외모, 몸매, 심지어 성공한 친구와 예쁘고 잘생긴 애인 마저 자신을 부풀리는 수단이다. 우리는 이러한 소유물이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인간을 가치화하여 나의 가치를 규정하는 건 나와 주변인을 물건으로 전락시키는 꼴이다. 즉, 우리가 조건과 기능을 위해 끊임없는 소유를 하는 한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소유는 필히 존재와 관계에 대한 불안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 우리는 우디의 선택을 통해 불안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영원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져버리고 피할 수 없는 이별을 향해 앤디에게 돌아가는 우디의 뒷모습은, 그 의미가 다소 딱딱한 문장으로 들리겠지만, 관계의 끝을 알고 있기에 오히려 덤덤한 그래서 주어진 시간동안 관계에 최선을 다하겠단 능동적인 결단을 품고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오늘의 관계는 어제가 아니다. 관계에 대한 가치를 알아보는 것. 지나온 관계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린 존재양식을 엿볼 수 있다.
여기까지가 토이스토리 분석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때론 무책임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훈육에도 부모는 사랑이란 정당화를 하듯 우린 건강하지 못한 사랑에도 그저 사랑이니까 괜찮다고 말합니다. 프롬은 건강한 사랑과 그렇지 않은 사랑을 구분할 줄 알아야한다고 말합니다. 나의 사랑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이타적이고 건강한 의도인지(능동) 결국 나의 감정을 우선시 하는 이기심에서 비롯된 가짜 사랑인지(수동) 구분할 줄 모른다면 깊은 사랑을 할 수 없다고 말이죠. 여러분은 상대를 존재 자체로 사랑하나요? 다르게 질문하겠습니다. 상대가 지금의 조건과 기능을 잃더라도 괜찮다고 얘기할 수 있나요? 어쩌면 상대의 ‘조건’을 사랑하고 있진 않은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세요!
+ 3편은 예정되어 있던 이별을 마주하는 내용 입니다. 3편은 따로 분석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구조적으로나 서사 역시 훌륭하게 흘러갑니다. 다만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동진 평론가의 토이스토리 3, 한줄평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이별의 순간이 왔다고 해서 꼭 누군가의 마음이 변질되었기 때문인 건 아니다. 어떤 이별은 그저 그들 사이에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찾아온다.’
+ 박물관에 전시 되는 것은 사랑을 ‘받기’ 위해 좋은 장난감이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수동적 사랑이고 아이들과의 교감이 없는 수직적인 관계입니다. 박물관은 ‘사랑함’이라는 능동적 관계와 거리가 먼 선택지라는 것이죠. 사랑 받으려하는 것은 사랑을 유지하기 위함과 전혀 다른 것 입니다. 프롬이 능동이냐 수동이냐를 구분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 4편은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쓰레기였던 포크가 아이가 불어넣어준 생명력에 장난감이 되는 순수한 설정처럼, 영화의 끝에선 우디가 장난감의 본분을 마치고 소유물이라는 규정 너머의 세상으로 떠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 현대인들이 사진을 과할정도로 많이 찍는 이유 역시 순간과 기억에 대한 소유욕에서 비롯됩니다. 이 내용은 이후에 정서기억법이라는 연기술을 비판하는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