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부터의 도피 - 에리히 프롬
오늘은 유독 한국에서 유행하는 성격 유형론인 MBTI의 순기능에 가려진 문제점을 살펴보고 우리가 mbti에 열광하는 이유와 그 근간에 있는 불안, 불안을 해소하는 보다 나은 방법을 제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mbti가 어느 정도 신뢰 가능한가? 혹은 혈액형, 별자리, 사주에 비해 얼마나 과학적인가를 논하는 자리는 아닙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세대론(mz, x세대, 꼰대 등등)이나 성격, 유형론을 옹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글이 유형론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을 일삼는 글이 되진 않을 거라고 약속드리고 제 기준, 최대한 mbti 과몰입러, 극혐러 모두가 읽어도 좋을 법한 글을 써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한국 한정으로) 처음 만난 상대와 대화를 이어나갈 때 MBTI 만큼 간편한 주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상대의 유형을 알고 나면 왠지 모르게 상대를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다는 일종의 친밀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죠. 또 나와 다른 15가지의 유형이 존재한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조금은 벗어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의 확장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타인에 대한 이해야말로 융이 유형론을 이야기한 궁극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토록 열광하는 mbti 유행의 근간에는 뜻밖에 불안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인간관계라는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한 상태가 주는 불안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상대를 보다 예측 가능한 존재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 인간관계가 주는 부담감으로부터 안정감을 찾기 위해 유형론이라는 형식에 맞춰 상대를 파악하는 쉬운 방법만을 선택해왔다는 것. 이러한 선택은 상대의 개성과 존재를 알아가려는 노력이라기보단 상대가 나에게 득인지 실인지를 따지는 실용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빠른 파악을 위해 유형론을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실용적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mbti는 융의 이론을 기반으로 만들었습니다.)
미국 남북 전쟁은 표면적으로 흑인 노예해방을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은 노예해방을 외치던 북부군의 승리로 끝났고 미국 내에 흑인 노예들은 날 때부터 주어진 노예란 계급에서 벗어나 드디어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자유란 책임질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 일이었습니다. 평생을 누군가의 명령에 복종하며 살아왔던 이들에게 자유란 감당하기엔 벅찬 것이었죠. 결국 주어진 자유에 부담을 느낀 대부분의 흑인 노예들은 안정을 되찾기 위해, 다시 백인 귀족들에게 돌아가며 스스로를 노예로 전락시키기에 이릅니다.
에리히 프롬의 첫 번째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인간은 자유라는 (감당할 것이 많은) 불안을 마주할 때, 안정감을 위해 자신의 자아를 타인에게 위탁하고 타인의 사고에 편승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이는 비단 흑인 노예만의 예시로 끝나지 않습니다. 형태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죠. 유행하는 패션, 트렌드에 편승하여 남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소속감을 느끼고,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사고를 일임하여 그들의 사고에 편승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또 mbti 같은 성격 유형론을 바탕으로 나와 비슷한 유형들에게 안도와 소속감을 느끼기는 방식 등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습니다. (회사, 군대, 종교, 유행, 정치 등등)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만의 사고를 하는 데서 부담을 느꼈기 때문에 자신이 부여받은 자유를 타인에게(유행에) 반납하며 안정감을 얻어 냈다는 것입니다. 그 대가로 자아와 개성을 상실하면서까지.
글쎄요. 인간관계(자유)가 주는 불안을 피해 mbti라는 유형론(안정)으로 도피했다는 저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 확신합니다. 상대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행위는 유형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수동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한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상대에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관계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 어쩌면 나를 지키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mbti라는 성격 유형론은 나와 다를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개인주의가 판을 치던 우리의 일상에서 상대를 이해해보려는 사소한 노력이자 촉매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mbti는 유형을 토대로 상대를 ‘안다’고 이야기합니다. 누군가를 알아가는 데에는 필수적으로 시간이 필요한데도 말이죠. 그 사람의 개성을 알아보려는 것은 끊임없는 관심에서야 비로소 조금 맛볼 수 있는 달콤함 같은 것이란 걸 알기에 우린 그 과정이 두렵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에겐 선택만이 남아 있습니다. 기존의 방식처럼 상대를 알아가려는 노력을 포기할 것인지, 상대를 알아가는 데 시간을 쓰는 것이 사실 인간관계의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유형이 아닌 상대의 존재 자체를 알아가기 위해 온 관심을 쏟을 것인지. 유형론을 바탕으로 상대를 빠르게 알아가는 것도 어느 정도 유용하겠지만, 상대를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상대의 유형이 아닌 상대 자체의 개성을 알아보려 노력하기를 멈춰 선 안됩니다. 서로를 알아가는 재미를 포기하지 마세요! 그 노력은 분명 피로하고 상처도 있겠지만 그게 관계를 가치 있게 만드는 노력임은 분명합니다. 상대를 알아봐주는 건 자신마저 가치있게 만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