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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필록 Nov 07. 2020

걷는 사람 최필록

내가 다시 글을 쓰는 이유

2년쯤 전이었던가. 배우 하정우의 에세이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은 적이 있다. 지독하게 걷기를 좋아해 동료들과 함께 걷기 동호회를 만들고, 국토대장정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을 정도의 걷기 중독자. 내가 이 책을 흥미 있게 읽은 이유는 나 또한 어릴 때부터 걷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걷기 역사'의 첫 시작은 고등학교 무렵으로 거슬러간다. 초등학교 때부터 오랜 친구였던 K(앞선 티벳 여행기에 나오는 K와 동일인물이다)와 나는 중학교까지는 같은 학교를 나왔지만 고등학교에 와서 다른 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다행히 우리의 학교는 그리 멀지 않은 같은 학군에 있었고,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지만 등하교 시간이 되면 항상 지옥을 경험시켜주곤 했던 악명 높은 노선이었기에 우리는 자연스레 학교까지 걸어가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도보로 약 40분 정도의 거리였기에 처음에는 체력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벅찼지만, 사춘기를 겪고 있던 시기에 죽이 잘 맞는 친구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걸으니 금세 적응이 되었다. 우리는 당시 판타지 소설에 한창 빠져있었고(이영도의 소설 '드래곤 라자'가 아마 이때쯤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근사한 소설 하나씩 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각각 학교의 문예부에 지원하게 된다. 


운이 좋았던 탓에 나와 K는 문예부 활동에서도 재능을 꽤 인정받았고, 실제로 몇몇 백일장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좋은 글을 완성하고 난 다음 날에는 서로의 창작 노트를 교환하여 조언을 나누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우리 아침산책의 주된 내용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3년 내내 이 시간은 계속되었는데, 나는 이 당시의 습관 덕분에 지금도 어떤 기로에 섰을 때 선택을 해야 하거나 생각정리가 필요할 때면 무작정 걷는 것을 좋아한다. 간혹 돌이켜보며 내가 글을 쓰는 데 있어 그때만큼의 총기를 낼 수 없는 까닭을 생각하는데, 아마도 편함을 핑계로 더 이상 걷지 않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당장의 돈벌이와 당장의 생활에 여유를 갖지 못하고 본의 아닌 절필을 선언한 지 4년여 만에 다시 글을 쓰는 요즘, 걷기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고 있다. 책을 읽거나 전시회를 보고 난 후에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따로 가지려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걷다 보면 내가 의도했던 그렇지 않았던 어느 방향으로든 생각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그 생각을 글로 치환할 수 있는 소재가 된다. 


얼마 전에 오랜만에 다시 만난 K에게서 표정이 어두워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요즘 글을 쓰지 않는다는 나에게 그가 건넨 말이 오늘 다시 생각이 난다. '어떤 글을 쓸지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각난 것을 그냥 쓰는 것'이라고. 당시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흘려들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나는 좋은 글을 쓸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준비는 그저 그런 글이라도 계속 써야 하는 것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하고, 글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이곳에서 나에게 귀감이 되는 좋은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좋은 글을 쓰고 싶다.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귀감이 되고 그 사람들이 나처럼 잠시 접었던 꿈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우선 경험하고, 느끼고, 걸어보자. 그리고 쓰자. 무엇을 쓰는지는 결단코, 그리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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