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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필록 Nov 19. 2020

바다도 각자의 얼굴이 있어.

낯빛이 다른 두 바다를 다녀오다

연차 전 날인 수요일 저녁, 퇴근 후 버스를 타고 야경을 보러 바다로 향했다. 전국에서 야경이 예쁜 바다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바로 광안리이다.


광안리는 서쪽으로는 남천동 삼익 아파트께부터, 동쪽으로는 민락동 회센터까지의 약 1.4Km 길이를 따라 펼쳐져 있다. 이곳은 광안대교가 지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큰 관광지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해운대보다 광안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현지인뿐 아니라 외지인들도 많이 찾는 바다가 된 곳이다. (부산 사람들은 바다를 간다 해도 해운대를 잘 찾지 않는다.)


사실 광안리를 제대로 느끼려면 낮보단 밤에 찾아가야 하는데, 바닷길을 따라 걸으며 광안대교의 야경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광안대교는 이제 '부산'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건축물이 되었다. 광안대교가 개통하기 전에 걸어서 광안대교를 올라가는 행사를 진행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만 해도 이 기다란 다리가 광안리를 '평범한 부산의 바다'에서 '전국적인 명소'로 바꾸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광안리에서 바라본 광안대교의 야경. 우리나라 바다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광경이 아닐까.


애초에 관광 목적으로 지어져 대형 호텔들이 즐비한 해운대와 달리, 광안리는 자생적으로 번화가가 된 곳이라고 한다. 그런 탓인지 광안리 앞에는 다양한 업종의 가게들이 많다. 횟집을 비롯한 각종 음식점, 카페, 술집 등이 건물 하나에 촘촘히 들어서 있다. 최근 들어서는 '오션 뷰'를 자랑하는 중소형 숙박업소들도 많이 생긴 모양이다. (심지어는 모텔 건물 1층이 횟집인 곳도 있다!) 관광지라기보다는 번화가에 바닷가가 껴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보면 되겠다. 코로나 사태로 자영업자들에겐 힘든 시기라고 하는 이야기는 이곳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가을의 평일 저녁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가게들의 명당자리는 이미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고 산책을 나온 주민들, 바다를 보며 사진을 찍는 친구 무리들,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은 바닷길을 따라 가을 바다에 취한 것만 같았다.

 

광안리 해변가에 위치한 각종 가게들. 바다 바로 앞이 제일 화려한 번화가 거리인 곳이다.


해변길을 따라 광안리를 둘러본 후 카페에 들러 음료를 마셨다. 운 좋게도 창가 자리가 생겨 광안대교를 바라보며 잠깐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바다에도 각자의 캐릭터와 얼굴이 있다. 해운대가 대형 기획사에서 '각 잡고' 키운 아이돌이라면, 광안리는 나만 알고 싶던 인디밴드가 방송을 타게 되면서 유명해지게 된 케이스라고 할까. 이제는 너무 유명해져서 살짝 아쉽긴 해도, 그래도 잘 돼서 내심 좋은 그런 이중적인 기분이 드는 바다라는 생각이 든다.




연차인 오늘은 아침부터 세찬 비바람이 불었다. 날씨가 웬만큼 궂지만 않다면 오전에 가려고 했던 곳을 포기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네시 경이되자 비가 그쳤고, 행여 늦을 세라 차를 몰았다,


오늘 찾아간 곳은 가덕도의 '대항'이다. 부산에서 이제는 찾기 힘든 어촌마을이라는 점에 이끌려서 무작정 찾아가기로 한 곳이다. 고층 아파트와 빌딩으로 채워진 시야가 어느 순간 산과 바다로 변했고, 다리를 건너고 언덕을 넘어 1시간여를 달려와, 드디어 가덕도 대항에 도착했다.


대항 입구에서 본 풍경. 해가 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기 좋은 곳이었다.


대항은 가덕도에서도 남쪽 거의 끝자락에 위치한 곳이라 낚시꾼들 이외에는 외지인들이 찾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내가 갔을 때에도 현지인들만 (그것도 간혹) 만날 수 있었고, 낚싯대를 들고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만 가끔 있었다. 해질 무렵 도착해 바라본 대항의 바닷가는 비 온 뒤의 고요함만큼이나 평화로웠다. 항구의 만(灣) 앞에 T자 형태로 지어진 방파제와 그 양 끝에 위치한 등대가 그 정취를 더했다. 작은 어촌 마을답게 큰 배는 찾기 어렵고 작은 어선들이 항구에 정겹게 매달려 있다. 내가 좋아하는 소소한 풍경이다.


유일해 보이는 커피가게에 들러 커피를 테이크아웃해 왔다. 나는 도시의 세련됨보다 시골의 촌스러움이 더 좋다.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퇴사하고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이곳 대항은 죽기 전에는 시골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더욱 들게 하는 소박한 곳이었다.


해변을 걸으며 바라본 풍경들. 사소하지만 누군가에겐 소중한.


다시 대항의 입구로 돌아와서 해가 질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았다. 서쪽 하늘로 사라지는 해가 주홍빛 인사를 건넨다. 땅거미가 지고 곧 어둠이 찾아왔다. 가로등이 켜진 길을 따라 등대를 향했다. 등대에서 맞는 바람에서 짠 냄새가 났다. 광안리의 반짝이는 화려함이 청춘이라면, 대항의 얼굴은 햇볕에 검게 그을린, 주름이 깊게 파인 촌사람의 느낌이다. 그리고 두 곳 모두, 아름다운 바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음'과 '아름다움'이 동의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외적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에 신경을 쓰고, 좋은 화장품과 좋은 옷을 사야 조금이나마 젊어보일 거라 생각하며 돈을 소비했었다. 그런 생각이 바뀐 건 얼마 전 본가를 찾았을 때였다. 내 시덥잖은 농담에 깔깔거리며 웃는 엄마의 주름살에서, 젊고 화려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이만큼의 알맞은 늙음 또한 누군가에겐 소중한 아름다움이다. 오늘 본 대항은 바로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해 지는 대항의 전경. 사라질지도 모르는 풍경이라 미리 담아두길 잘했다.


김해 신공항 프로젝트가 사실상 무산되며 가덕 신공항이 다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오늘 다녀간 이 대항 자리가 가덕 신공항이 들어온다면 그 부지가 되는 곳이다. 대항으로 들어서는 마을 입구에는 '가덕 신공항을 절대 반대한다'는 주민들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부산 시민 입장에서 보면 '오래된 김해공항을 재개발하는 것보다는 가덕 신공항을 추진하는 것이 더 낫지.'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터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사라질지도 모르는 곳이라는 생각에 발길이 쉽게 떠나지 않았다.




바다의 고장에서 태어나 자라온 나에게 지금에 와서야 바다를 보는 것이 특별할 것이야 있겠냐만은, 이틀에 걸쳐 부산에서 가장 화려한 바다와 가장 소박한 바다를 다녀오고 나서 대학교 때 들었던 '미학' 수업이 생각났다. 첫 수업에서부터 교수님이 과제를 내줬었는데, '본인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학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터라 그때 당시엔 등한시했던 질문을 오늘 스스로에게 해본다. 그리고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반짝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서투른 결론을 내려본다.


대항을 떠나기 전 만난 고양이 무리들. 간절하게 손길을 내밀어봐도 멸치 한 마리 없는 나는 그저 무시당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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