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필록 Nov 22. 2020

겨울 냄새를 아시나요?

야간 산책의 미묘함

추운 날씨를 좋아한다. 몸이 찬 편이라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지만 겨울이 되면 밤이며 새벽시간에 일부러 밖에 나가 골목길을 돌아다니곤 했다. 찬 공기가 피부를 얼얼하게 만드는 감각이 느껴지면 늦은 밤에 슬그머니 나갈 핑계를 찾곤 한다.


모처럼의 여유 있는 휴일 밤이었고, 집 근처에 독립서점이 세 군데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반년째 살면서 한 군데도 둘러보지 못했기에 오늘은 산책 겸 책 구경을 나서기로 했다. 부산 원도심 일대인 남포동 일대에서 회사를 다니고 살면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길을 작정하고 걷기로 한 것이다.


용두산을 끼고 돌아가는 골목길에 만난 풍경들.


'심야 서점'이라는 독특한 콘셉트 때문에 찾아간 독립서점 '미묘북'을 가려면 '부산 영화체험 박물관'으로 가는 골목길을 따라 남쪽 방향으로 쭉 가야 한다. 가는 길에 만난 새로운 풍경들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라 대부분의 가게들은 문을 닫고 있었고, 사람들이 없는 어두운 길은 (조금 무섭긴 했지만) 더욱 운치 있었다. 이곳 동광동의 길 건너 반대편은 대부분 인쇄소 골목이지만, 용두산 방면의 이쪽은 카페라던지 숙박업소, 작은 가게들이 주로 있는 곳이었다.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런 재미있는 길이 있었다니. 가장 오래 살아왔던 옛날 본가 집 근처도 어쩌면 못 가본 골목이 있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간판이 없어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던 '미묘북'에서 마음에 드는 책 두 권을 골라 사 왔다. 사장님께서 책을 읽고 계신 터라 내부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오래된 다락방 같은 콘셉트가 매우 마음에 드는 공간이었다. 돈을 벌기 위한 사업이라기보다, 본인이 책을 좋아해서 차린 아지트 같은 느낌인 곳이다. 아무래도 자주 가게 될 모양이다.


잡동사니를 모아놓은 듯한 다락방같은 컨셉의 '미묘북'. 간판도 없는 데다 키치Kitsch적인 느낌이 가득하다.


가게를 나와 이번에는 조금 익숙한 길을 따라 걸어본다. 회사에서 회식을 하거나 동료들끼리 술자리를 할 때에 자주 들리는 '동광동 2가'쪽의 술집거리를 지나, 광복로로 이어지는 골목이다. 토요일 밤 시간에 술에 취한 사람들의 대화가 점점 옅어지는 것을 느끼며 들어선 광복로에는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준비가 한창이다. 코로나 시국에 맞는 크리스마스는 마냥 즐기기엔 어쩐지 벌써부터 죄책감이 든다. 집과 가까운 곳에 트리축제가 펼쳐지는 것은 반길만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특선영화와 함께 집구석 파티를 해야 할 것만 같다.


광복로에는 크리스마스 준비가 한창이다.


광복중앙로를 따라 다시 집으로 향하는 길에 눈에 띄는 골목 사진들을 찍어본다. 사람이 붐비는 낮이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풍경들은, 밤이 되면 정겹게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서울에 살던 시절에 카페에서 일했던 때가 생각났다. 겨울에는 밤 11시에 일이 끝나면, 당시 집까지 약 30분 여정도를 걸어가곤 했다. 한껏 추운 날씨에 수시로 콧물을 킁킁대며 들이마셔야 했지만 코 끝이 찡한 한겨울의 공기가 너무 좋아, 귀에 동상이 걸려도 매일을 그렇게 걸었을 따름이다.


종종 야간 산책을 나가야겠다고 다짐한다. 사람이 뜸한 거리를 걸으며 마음에 드는 풍경을 눈에 담으니 어쩐지 '나만 아는 인디 가수 하나가 생긴듯한' 느낌이다. 기분 좋게 걷는 내내 한 손에는 서점에서 산 책봉투가 털레털레 소리를 내었고, 공기에선 벌써 박하향 같은, 겨울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사람이 드문 야간 산책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경들. 자주 나와 걸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다도 각자의 얼굴이 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