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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필록 Nov 12. 2020

2002년의 시간들

파랗게 빛났던 젊음

2002년은 대한민국 역사에 획을 그은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한일월드컵과 부산 아시안게임이라는 국제적인 큰 행사가 있었던 해이기도 했고,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안톤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 사건, 미군 장갑차에 의해 여중생 2명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난 때였기에 어느 때보다도 반미감정이 격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나 개인적으로도 2002년은 굉장히 중요한 한 해였다고 할 수 있겠다. 갓 스무 살이 된 나는 그전까지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동경과 로망을 가지고 살아왔었다. 기억도 잘 나지 않은 어린 시절에 몇 차례 가족여행을 와본 적 밖에 없던 도시에서 처음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왔던 서울의 첫인상은 '매우, 매우 추운 곳'이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오랜 친구 K와 함께 처음 올라온 2월의 어느 날은 하필 '몇십 년 만의 한파'가 찾아온 바로 그 날이었기 때문이다. 각자 서로의 학교 캠퍼스를 한 번씩 둘러보고, 우리가 찾은 곳은 경복궁. 겨울의 광화문과 경회루의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지만 매서운 북쪽의 추위를 견디기엔 부산 토박이 애송이들의 옷차림은 너무나도 얇았더랬다. 


학기를 시작하고 4인실 기숙사에서 쉽게 오지 않는 잠을 청했던 시간들, 시험기간에 친구들과 독서실에서 밤을 새우며 나눴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이뤄지지 않는 짝사랑 때문에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죽을 듯이 아파했던 기억들이 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나에게 스무 살의 가장 큰 추억은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이 아닐까 한다.


대학시절의 나는 모범생과는 거리가 먼,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학생이었다. 내가 선택한 전공이었지만 대학 공부는 무언가 나와는 맞지 않았고, 우연한 기회에 가입하게 된 '산악회'의 동아리 활동에 흥미를 붙이게 된 것이다. 선배들 동기들과 함께 한 달에 두 번 떠나는 근교 산행은 그전까지는 몰랐던 등산의 매력을 나에게 알게 해 주었고, 타지에서 온 외로움도 산악회 동기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풀곤 했었다. 5월 축제 기간에 떠난 지리산 종주에서,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귀한 '천왕봉 일출'을 보았고, 구름이 내 밑에서 파도치는 '운해'를 처음 만나며, 인생 처음으로 완전히 몰두할 수 있는 취미를 하나 만나게 된 것이다. 


어느샌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학교 공부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 아닌 동아리 사람들과 친구들이 되었고, 자연스레 6월 초여름의 열기에 우리는 함께 월드컵 거리응원을 나가게 된다. 그 당시는 사실 1학기 기말고사 기간이었지만 이미 학교 공부에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나는 수업도, 시험도 참석하지 않은 채 국가대표 축구팀이 세계의 강호들을 깨부수는 장면들에 환호하는 순간을 즐기기로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거리응원은 32강 예선 미국전이었는데, 앞서 말했던 것처럼 당시 우리나라는 반미감정이 가장 격했던 시기라 미국전에서의 거리응원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었다. 비가 꽤 많이 오는 날이었지만, 너나 할 것 없이 거리응원에서 우산을 쓴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결과는 무승부였지만, 후반전 막판에 안정환이 골을 넣고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때의 김동성과 안톤 오노의 사건을 패러디했던 세리머니는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사람이 너무나도 많고 비 때문에 더 복잡한 날이었던 탓에, 10명가량 되었던 산악회 일행들은 어쩌다 보니 서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나와 H(티벳 여행기에 나온 그 H가 맞다.)는 화장실을 잠시 갔다가 일행들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때의 무선통신 기술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몰릴 경우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못했다. 핸드폰이 완전히 먹통이 되는 것은 다반사였다.) 출출하던 차에 우리는 근처 분식집에 가서 우동을 먹으며 나머지 경기를 지켜보았고, 그전까지 크게 친하지 않았던 H와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 날을 계기로 절친한 사이가 된다. 


경기가 끝나고 다행히도 한 선배와 연락이 되어 산악회 일원들은 종로 피맛골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고, 기분이 한껏 좋아진 막걸릿집 사장님이 주류 무제한 공짜를 선언하는 바람에 우리는 비에 젖은 채로 술에 취하고, 청춘에 취했다. 가끔 대학교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받을 때면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월드컵 이야기일 정도로 우리에게는 소중하고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대학교 1학년 1학기 나의 성적은 매우 처참했다. 학생의 신분이지만 노는 데에만 매진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대학교 등록금으로 냈던 큰돈이 부모님 입장에선 매우 아까우실 테고, 그 돈으로 공부를 하지도 않은 데다가 졸업도 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부모님께는 죄송할 따름이다. 허나, 내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스무 살의 나에게 나 스스로를 가장 파랗게 빛나게 하는 일들은 도서관이나 강의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순간들에 있었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의 스물 시절 나태함과 방탕함에 스스로가 수치스럽기는 하나, 후회스럽지는 않다. 그때가 아니면 누리지 못할 청춘을 한껏 누렸다고, 감히 자부한다.


청춘(靑春)이 왜 푸른 봄인지 18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곰곰이 생각해본다. 하늘처럼 넓고 무한하며, 바다처럼 깊은 가능성을 표현하는 색이며, 한편으로는 외로움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실패가 무엇인지 깨달으며 알게 되는 우울의 색이기도 하다. 파란색만큼 스무 살의 활기와 절망을 동시에 표현하는 색상이 또 있을까. 그때만큼 파랗게 빛나는 순간이 잠깐이라도 다시 있을까.


* 오늘 글의 제목은 내가 좋아하는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노래 제목에서 따왔다. 혹시나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들어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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