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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필록 Nov 02. 2020

아날로그를 좋아했어요.

필름카메라는 가을맛

2005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군대를 전역하고 대학에 복학하기까지 시간이 남아있던 터라 가스충전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었고, 일이 어느정도 익숙해지자 무척 심심해하던 나에게 친구가 본인은 사진을 취미로 찍고 있다며, 같이 시작해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허나 야간수당까지 있는 아르바이트라 하더라도 일개 대학생 신분인 나에게 그 때만 해도 금전적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던 디지털카메라는 넘볼 수가 없는 존재였으므로 나는 그 대신 중고거래로 비교적 쉽고 저렴하게 손에 넣을 수 있는 필름카메라를 구매하게 된다.


그렇게 마주한 내 첫 카메라는 미놀타(Minolta)社의 X-700이라는 모델로, 당시 바디+기본 50미리 렌즈 구성품이 10만원 초중반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글을 쓰면서 요즘의 중고가를 다시 알아보게 됐는데, 아직도 그 가격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상태가 매우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사진을 배우기엔 가성비 측면에서는 좋은 카메라라고 들었기 때문에 만족하면서 썼던 기억이 난다.


인사동이었나, 삼청동이었나 아무튼 그 언저리의 카페에서.  그 당시의 종로는 젊은 사람들에게도 볼거리가 많은 곳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사진이라는 취미는 내가 경험했던 어떤 여가활동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꾸준하게 즐기는 것이 되었지만, 지금은 스마트폰이라는 매우 편리한 디지털기기 덕분에 정작 카메라는 손에 놓아버린지가 오래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을이 되면 가끔 내가 찍어놓은 사진들을 클라우드에서 스윽 훑어보게 된다. 명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요즘에 핸드폰으로 찍는 '빠른 사진'보다, 그 때의 '호흡이 느린 사진'이 어딘가 더 따뜻해보인다. 서늘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이 계절에 꺼내어 입는 오래된 외투같은, 그런 온기가 있다.


꽃을 좋아하면 아재라는데, 나는 왜 어릴 때부터 꽃을 좋아했을까.


필름카메라를 가지고 학교에 복학했을 때 친구들이 신기해하고, 몇몇은 필름카메라를 직접 구매해 소모임 형식으로 출사를 나가곤 했었다. 우리가 주로 다니던 곳은 종로 일대였고, 그 날의 일정이 끝나면 피맛골에서 막걸리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 하곤 했었다. 나는 오늘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 시절의 인사동, 교보문고, 정독도서관, 피아노거리, 경복궁, 낙원상가, 명동성당 등이 그립다. 종로 금강제화 앞에서 목에 필름카메라 하나씩을 메고 만났던 우리의 반가움이, 어제보다 추운날씨에 웃음과 함께 나온 너희의 입김이, 젊음이, 아직도 나는 또렷하다.


대학을 중도에 하차하고(이 이야기는 차차 풀어보도록 하자), 직장생활을 이어오다보니 어느새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것은 자연스레 내 생활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들이 경쟁 속에서 태어났고, 20대의 막바지 조급했던 시기의 나에게는 디지털카메라의 편리함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어쩐지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의 결과물은 무언가 허전했다. 그 시기의 내가 큰 고비를 보내고 있을 때여서 그랬던 건지, 실제로 결과물 자체가 좋지 않았던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때 분명히 깨달은 건 나는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필름사진을 볼 때면 그 순간의 기분이 '찰칵'하고 떠오른다.


글을 쓰는 것도 그랬다. 고등학교 때 문예부 활동을 할 때만 해도 나는 '창작 노트' 에다가 수기로 글을 작업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대학시절에 '싸이월드'가 등장했을 때, 남들은 다 쓰는 일기라던지, 감성이 넘쳐 흐르는 소위 '흑역사' 글들 조차도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사진도 필름카메라에서 디지털카메라로, 다시 스마트폰카메라에 낯을 가리지 않으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했던 터다.


성격 탓도 클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본디 무엇이든 느리게 배우는 편이다. 어떤 사건에 맞딱드렸을 때, 예상된 일이라 할지라도 겪어가며 깨닫는 종류의 사람이다. 그래서 실수도 많고, 뼈 아픈 실패의 경험도 많다. 지금의 내가 디지털문명에 잘 적응한 사람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노트북과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보며 웃고,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무료함을 달래고, 스마트워치가 카톡이 왔다고 알려주지만, 정작 내 생활이 편안해졌냐고 묻는다면 글쎄...하고 얼버무려버릴 것 같다.


아니, 편안해진 것은 확실히 맞다. 두세 번의 절차를 거쳐야 할 일이 한번의 손가락질로 끝나버리니까, 그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셈이다. 그렇지만 그 자투리시간을 어딘가에 또 써야할 것만 같은 강박관념이 생긴다. 더 많은 0과 1의 세상에 나를 소비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노트에 펜으로 꾹꾹 눌러 글을 쓰고 필름카메라로 천천히 초점을 맞추며 사진을 찍던 내가 얻던 마음의 평안은, 오늘처럼 노트북 모니터로 보는 필름카메라 사진으로만 느껴질 따름이다.


'편안'과 '평안'의 한 끗 차이, 나는 어쩌면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필름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그 시절처럼 잠시나마 '평안'을 찾으려 했던 건 아닐까. '편안'에 만족해버린 나는 아날로그와 작별해야 하는 것일까.


필름카메라는 가을맛. 추울 때 꺼내보면 잠깐은 평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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