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반짝이는 것들
연차인 오늘은 아침부터 세찬 비바람이 불었다. 날씨가 웬만큼 궂지만 않다면 오전에 가려고 했던 곳을 포기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네시 경이되자 비가 그쳤고, 행여 늦을 세라 차를 몰았다,
오늘 찾아간 곳은 가덕도의 '대항'이다. 부산에서 이제는 찾기 힘든 어촌마을이라는 점에 이끌려서 무작정 찾아가기로 한 곳이다. 고층 아파트와 빌딩으로 채워진 시야가 어느 순간 산과 바다로 변했고, 다리를 건너고 언덕을 넘어 1시간여를 달려와, 드디어 가덕도 대항에 도착했다.
대항은 가덕도에서도 남쪽 거의 끝자락에 위치한 곳이라 낚시꾼들 이외에는 외지인들이 찾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내가 갔을 때에도 현지인들만 (그것도 간혹) 만날 수 있었고, 낚싯대를 들고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만 가끔 있었다. 해질 무렵 도착해 바라본 대항의 바닷가는 비 온 뒤의 고요함만큼이나 평화로웠다. 항구의 만(灣) 앞에 T자 형태로 지어진 방파제와 그 양 끝에 위치한 등대가 그 정취를 더했다. 작은 어촌 마을답게 큰 배는 찾기 어렵고 작은 어선들이 항구에 정겹게 매달려 있다. 내가 좋아하는 소소한 풍경이다.
유일해 보이는 커피가게에 들러 커피를 테이크아웃해 왔다. 나는 도시의 세련됨보다 시골의 촌스러움이 더 좋다.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퇴사하고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이곳 대항은 죽기 전에는 시골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더욱 들게 하는 소박한 곳이었다.
다시 대항의 입구로 돌아와서 해가 질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았다. 서쪽 하늘로 사라지는 해가 주홍빛 인사를 건넨다. 땅거미가 지고 곧 어둠이 찾아왔다. 가로등이 켜진 길을 따라 등대를 향했다. 등대에서 맞는 바람에서 짠 냄새가 났다. 광안리의 반짝이는 화려함이 청춘이라면, 대항의 얼굴은 햇볕에 검게 그을린, 주름이 깊게 파인 촌사람의 느낌이다. 그리고 두 곳 모두, 아름다운 바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음'과 '아름다움'이 동의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외적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에 신경을 쓰고, 좋은 화장품과 좋은 옷을 사야 조금이나마 젊어보일 거라 생각하며 돈을 소비했었다. 그런 생각이 바뀐 건 얼마 전 본가를 찾았을 때였다. 내 시덥잖은 농담에 깔깔거리며 웃는 엄마의 주름살에서, 젊고 화려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이만큼의 알맞은 늙음 또한 누군가에겐 소중한 아름다움이다. 오늘 본 대항은 바로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김해 신공항 프로젝트가 사실상 무산되며 가덕 신공항이 다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오늘 다녀간 이 대항 자리가 가덕 신공항이 들어온다면 그 부지가 되는 곳이다. 대항으로 들어서는 마을 입구에는 '가덕 신공항을 절대 반대한다'는 주민들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부산 시민 입장에서 보면 '오래된 김해공항을 재개발하는 것보다는 가덕 신공항을 추진하는 것이 더 낫지.'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터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사라질지도 모르는 곳이라는 생각에 발길이 쉽게 떠나지 않았다.
바다의 고장에서 태어나 자라온 나에게 지금에 와서야 바다를 보는 것이 특별할 것이야 있겠냐만은, 이틀에 걸쳐 부산에서 가장 화려한 바다와 가장 소박한 바다를 다녀오고 나서 대학교 때 들었던 '미학' 수업이 생각났다. 첫 수업에서부터 교수님이 과제를 내줬었는데, '본인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학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터라 그때 당시엔 등한시했던 질문을 오늘 스스로에게 해본다. 그리고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반짝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서투른 결론을 내려본다.
* 이 글은 20년 11월 19일 작성한 '바다도 각자의 얼굴이 있어'를 각색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