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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필록 Jan 14. 2021

'중지'해야 하는 것, [1917]

전쟁에 영웅은 없다

나는 사실 전쟁 영화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 라던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 조차도 그리 감명을 받지 못했던 터라, 주변에서 [1917]에 대한 추천을 한창 받던 때에도 굳이 찾아서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료한 저녁 시간 핸드폰에서 이곳저곳을 방랑하던 때,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영화 앱에서 '언제까지만 무료'로 [1917]이 메인 화면에 나와있었고, 예전에 지인들의 추천이 생각나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청하지 않은 분들께서는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영화는 세계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다. 영국군 병사인 스코필드(조지 맥케이 분)와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 분)는 독일군에 의해 통신망이 파괴된 상황에서 함정에 빠진 영국군 부대의 맥켄지 중령(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에게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하는 전령을 전달하는 명령을 받게 된다. 특히 맥켄지 중령이 이끄는 '데본셔 연대'에는 블레이크의 형이 있었고, 블레이크는 자신의 가족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스코필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부랴부랴 길을 나선다.


시체로 가득한 전장을 지나고, 독일군이 철수한 주둔지에서 부비트랩에 걸려 죽을 뻔한 위기를 맞으며 두 병사는 점점 목표지점에 가까워져 간다. 중간지점쯤 왔을까. 비어있는 민가를 탐색하던 도중 아군 전투기와 독일군 전투기의 전투 장면을 목격하는 그들. 그러다 돌연 독일군 전투기가 스코필드와 블레이크가 있는 곳으로 추락하게 되고, 불이 난 전투기에서 독일군 조종사를 살리려던 블레이크는 오히려 독일군 조종사의 칼에 찔려 사망하게 된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이 미션이 탐탁지 않았던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상관의 명령뿐 아니라 블레이크의 혈육에게 부고를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임무를 성공해야 한다는 사명감은 지휘관에게서 블레이크로, 블레이크에게서 스코필드로 전달된다.


블레이크의 죽음 직후 스코필드는 우연히 근처에서 독일군 전투기의 추락을 보고 확인하기 위해 온 부대의 병사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을 도와준 병사들의 지휘관인 스미스 대위(마크 스트롱 분)의 배려로 그들 부대의 트럭에 얻어 타게 된다. 가까운 길까지 가던 도중 다리가 끊어진 것을 확인한 스코필드는 무리에서 떨어져 다시 혼자만의 길을 가게 되는데, 인사를 나누는 스미스 대위로부터 '명령을 전할 때는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전하라'는 조언을 듣게 된다. '전쟁을 끝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혼자만의 임무를 시작하게 된 스코필드, 이번에는 갑작스러운 저격수의 총격을 받게 된다. 겨우 저격수를 잡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적이 쏜 총알이 스코필드의 철모에 비껴맞으며 그는 정신을 잃고 기절하게 된다.


얼마가 지났을까, 그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마을은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후로, 불바다가 되어있었다. 독일군의 총탄 세례를 피해 우연히 들어가게 된 집에서 그는 한 프랑스 여인을 만나게 된다. 말이 제대로 통하지는 않았지만 손짓 발짓을 통해 목적지를 가려면 강을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스코필드. 그리고 그녀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기와 둘이서 살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음식과, 블레이크가 죽던 곳에서 얻은 우유를 여인에게 남기고 다시 길을 떠난다.


다시 수차례의 위기를 지나 강으로 뛰어드는 스코필드. 그리고 급류에 휘말려 다시 정신을 잃을 뻔 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잔잔한 물가에 도착하게 되고, 수많은 시체가 쌓여있는 강둑을 기어 올라 마침내 육지를 다시 밟게 된다. 그곳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노랫소리에 가까이 다가간 스코필드는 많은 영국군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며 한 병사의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데본셔 연대'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미 공격은 막 시작된 터였고, 정신이 번쩍 든 스코필드는 중지명령을 전달하려 최후의 질주를 시작하게 된다. 공격 준비를 하러 가는 병사들 틈을 지나 맥켄지 중령이 있는 위치를 마침내 알게 되지만, 공격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그는 마지막 결단을 내린다. 공격 명령이 떨어지고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병사들을 횡단하면서 맥켄지 중령이 있는 곳까지 뛰어가는 것이었다. [1917]의 여러 명장면 중 손에 꼽히는 장면이다.


몇 차례 넘어지고 엉키다 겨우 맥켄지 중령이 있는 방공호까지 도착한 그는 드디어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하지만, 중령은 아랑곳 않고 이미 시작된 공격을 철회할 수 없다고 한다. 스코필드는 트럭 부대와 만났을 때 들었던 스미스 중위의 조언대로, 모두가 모여있는 곳에서 명령 내용을 말한다. 그제야 맥켄지 중령은 명령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 남은 것은 블레이크의 형인 조셉 블레이크 중위(리처드 매든)를 찾아, 블레이크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야전 치료소를 헤매다 만나게 된 블레이크 중위에게 슬픔을 가득 담아 동생의 죽음을 전하고, 그의 유언대로 블레이크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러 가도 되겠냐고 묻는다. 블레이크 중위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그것을 허락하게 되고, 스코필드는 마침내 근처의 나무기둥에 기대어 휴식을 취한다. 영화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나무에 기댄 스코필드의 모습은 묘하게 비슷하지만, 블레이크는 없고, 스코필드는 사색에 잠긴다.






[1917]이 사람들의 호평을 받는 이유는 아무래도 '원 컨티뉴어스 샷(One Continuous Shot)'으로 촬영한 독특한 기법 덕분일 것이다. 2시간의 영화 내내 롱테이크로 하나의 카메라가 주인공인 스코필드를 따라 장면을 보여주며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는 사실 한 번의 테이크로 찍은 것이 아니라, 교묘한 편집점이 있는 촬영기법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기법을 통해 롱테이크처럼 보이게 했다는 점이 더욱 대단한 부분이라는 생각이다. 화려한 연출이나 과장된 특수효과를 통해 전쟁을 그려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전쟁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연출을 통해 더욱 그 참혹함을 실감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좋아하지 않았던 '애국심에 고취된 전쟁 영웅'이 주인공이 아닌 점도 마음에 들었다. 스코필드는 이미 이전의 전투를 통해 훈장을 받기도 했지만, 그 훈장을 프랑스 병사와 거래를 통해 와인으로 바꿀 만큼 가치 없게 생각한다. 그저 그가 가슴에 품고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을 뿐이다. 내가 젊은 시절에 겪었던 군대 2년 동안의 감정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저 나에게 따뜻했던 사람들이 그립고, 한시라도 빨리 내가 속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을 따름이다. 애초에 스코필드는 미션을 받은 블레이크 옆에 우연히 자고 있었을 뿐이었고, 2명이 필요한 미션에 블레이크의 선택을 받아 자의가 아닌 상태로 명령을 받게 된 사람이다. 블레이크 또한 내 조국의 수많은 전우들이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에 미션을 수락했다기보다는 본인의 핏줄인 형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명감을 가졌을 것이 틀림없다. 이런 캐릭터들이 더욱 현실감이 있었기에 영화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 떨어진 미션이 '공격 중지 명령'인 것,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그 명령이 성공하는 것을 통해 이 영화는 전쟁이라는 것은 '중지'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전쟁을 지휘하는 입장이나 사람들을 다루는 입장에서 그것을 멈추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분명 있겠다. 허나 전쟁에서 무의미하게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 블레이크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것처럼 - 누군가의 가족들인 것이다. 나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가족을 죽여야만 하는 끔찍한 일이,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잔혹한 전쟁의 어두운 면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죽을 고비를 수 차례 넘기고 명령을 전달하고 임무를 완료한 스코필드는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다. 그가 훈장을 고철덩어리 취급하는 까닭은 스스로가 영웅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가 살아서 자신의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누군가의 가족이었을 적군의 병사들을 죽여야만 했다. 그런 행위가 '애국'이라는 허울로 덮어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아는 것이다.


전쟁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현재가 [1917]과 같은 전쟁영화를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아직 우리는 전쟁이 끝나지 않은 분단국가에 살고 있으며 그 전쟁을 끝내는 일은 결코 서로의 얼굴에 총구를 겨누는 것이 아닌 서로의 이해를 통해서여만 하기 때문이다. 서로 떨어져 지낸 지 오랜 세월이 흐른만큼 그 이해의 시간은 오래도록 걸릴지라도 말이다. 지금의 '중지'가 언젠가는 '종료'가 되기를, 그런 기회에 나 또한 스코필드처럼 달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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