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부재'를 통해 드러난다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뭐를 써야 될지 모르겠어요. 저한테 세상은 수수께끼 같거든요.'
소설가가 되고 싶어 글을 쓰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어서 쓰지 못하는, 그래서 변변한 직장 없이 소일거리만 하며 생활하는 종수(유아인 분), 우연히 어릴 적 동네 친구였던 해미(전종서 분)를 만나게 되고 이후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지지만,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 후 돌아온 그녀 옆에는 낯선 남자 벤(스티븐 연 분)이 함께다. 특별한 직업도 없이 그저 재미있는 것만 좇아 살면서도 세상에 좋은 것들은 다 누리고 사는 미스터리한 인물 벤에게 질투를 느끼는 종수. 벤과 해미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에 불안해하던 날들 사이로, 벤과 해미가 종수가 사는 파주의 집으로 찾아오고, 해미가 잠든 사이 종수와 벤은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취미로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벤. 종수는 해미에 대한 마음을 해미가 아닌 벤에게 고백하지만, 벤의 킥킥거리는 비웃음만 들릴 뿐이었다.
'지저분해서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들, 걔네들은 다 내가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
그리고 다음 날 이후부터 해미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첫 만남부터 벤에게 이상함을 느껴왔던 종수는 벤이 벌써 타깃을 정해놨다는 '종수의 집에서 아주, 아주 가까운' 타버린 비닐하우스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찾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타서 없어져버린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비닐하우스는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고, 종수가 찾는 것은 벤이 잔인하게 살해하거나 사라지게 만들었을 해미의 존재다. 그러나 해미와 연관된 모든 곳을 수소문해봐도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겨우 찾아간 그녀의 자취방은 마치 아무도 살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그녀가 아프리카로 떠날 때 종수에게 주기적으로 사료를 채워달라고 부탁했던, 종수가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던 고양이의 존재는 오히려 벤의 집에서 나타나게 된다.
벤의 집 근처를 기웃거리며 그를 감시하다 벤과 딱 마주쳐버린 날에, 벤은 오히려 종수를 벤과 그 친구들의 홈파티에 초대한다. 해미에 대해 할 말이 있었다던 종수는 해미와 함께 벤의 친구들의 파티에 초대됐던 날과 똑같은 순간들이 반복되는 것을 보게 되고, 벤의 집을 빠져나온다. 뒤따라 나온 벤이 해미에 대해 할 말이 있지 않았냐고 묻자,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종수. 그리고 그는 해미의 자취방에서 해미와 함께 있는 생각을 하며 드디어 쓰고 싶었던 글을 쓴다.
이창동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버닝]은 매우 모호한 영화다. 스크린으로 보이는 장면들은 명확하지만, 마지막까지 그것이 '존재'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종수와 해미의 첫 만남에서 해미가 종수에게 하는 대사 한 마디가 영화 전체의 해석을 어느 쪽으로든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 귤이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는 거야.'
해미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종수에게 존재했다가 사라져 버린 해미는 정말로 벤이 해친 것일까.
영화 내내 이런 의문이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극의 흐름대로라면 누구나도 벤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놓았지만, 이미 영화 첫 부분에 장치해놓은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닌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 때문이었다. 애초에 없었으면 모를까,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려면 애초에 그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팬터마임만으로도 귤의 향과 맛을 느낄 수 있으려면, 귤을 한 번이라도 실제로 먹어봐야 하는 셈이다. 해미의 집에 처음 갔을 때에 겁이 많아 낯선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고양이 '보일'을 종수에게 소개할 때 종수가 이런 말을 한다.
'내가 고양이가 없다는 사실만 잊으면 되는 거야?'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대사가 해미에게서 다시 종수에게로 리바이벌되는데, 마지막에 해미의 방에서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종수의 장면을 보며 어쩌면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모두 종수가 쓰는 소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이야기가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닌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방식으로.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다.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 가상의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다만 그 이야기 자체가 현실성을 가지지 못한다면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종수는 본인에게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이야기의 구조를 뒤집고, 은유를 뒤섞어 소설을 완성했다. 지금부터는 내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바라본, 영화의 해석이다.
파주에서 소 농장을 하던 아버지가 폭행사건에 휘말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6년 만에 찾아온 어머니는 빚 갚는 돈을 종수에게 달라고 한다. 백수였던 종수에게 아버지의 합의금과 어머니의 빚을 갚을 능력은 없었다. 그러나 문득,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난 어릴 적 동창 해미가 생각났다. 해미의 남자 친구인 벤이라는 사람이 돈이 많다는 것을 알았던 종수는 악랄한 계획을 세운다. 해미를 납치해 벤으로부터 돈을 갈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고, 결국은 벤의 의심을 사게 된 종수는 그 마저 죽이기에 이른다.
내 해석대로라면 영화의 진짜 마지막 장면인 종수가 벤을 칼로 찔러 죽이고 벤의 차를 불태우는 장면만이 현실일 것이고, 그 앞의 장면들은 허구와 사실이 교묘하게 섞여 있는 장면일 게다(물론 그 경계는 매우 모호하다. 감독은 애초에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겨두길 원했던 것 같다). 해미는 비닐하우스 안에 혼자 남아있던 송아지처럼 누군가에게 팔려갔을 것이다. 아버지의 죄에 대한 탄원서를 쓰던 그가 이제는 본인의 죄를 덮기 위해 글을 쓴다. 종수의 글은 소설이기도 하거니와, 자신의 범죄에 대한 알리바이인 셈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며 사실이라고 믿었던 장면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텅 비어있는 부재의 공간인 것이다. 해미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지 않음으로 인해 종수의 이야기 - 나아가서는 영화 전체의 이야기 - 는 완성된다.
영화의 초반부에, 해미가 종수에게 부시맨 이야기를 꺼내며 '리틀 헝거(Little Hunger)'와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에 대한 말을 한다. '리틀 헝거'는 말 그대로 생리적인 배고픔에 굶주린 자를 의미하고, '그레이트 헝거'는 그것을 넘어, 삶의 의미에 굶주린 자를 의미한다. 가난과 불행을 겪으며 살아온 종수는 과연 '리틀 헝거'일까 '그레이트 헝거'일까.
내 생각은 둘 다이다. 삶의 의미보다는 삶 자체를 살아야 했던 현실 속 범죄자 이종수는 '리틀 헝거'였겠지만, 자신이 쓰는 소설 속의 인물들을 창조한 작가 이종수는 '그레이트 헝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태워버린 것은 자신이 살해한 벤과 벤의 차였지만, 사실은 해미와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스스로 끊어냄으로써 해미가 그의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도록 하는, 스스로만의 해결법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는 현실로부터 사라지고 싶었던 건, 영화 속 해미가 아니라 어쩌면 작가가 된 종수의 마음이 투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 어쩌면 애초에 해미이건 벤이건 없는 존재일 뿐이고 정신병을 겪는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절실한 애착이 만든 소설이 아니었을까.
'저~기 끝없는 지평선에 노을이 지는 거야. 처음엔 주황색이었다가 피 같은 붉은색이었다가 그리고 보라색? 남색이었다가 그러면서 점점 더 노을이 사라지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야. 아, 내가 세상의 끝에 왔나 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 죽는 건 너무 무섭고, 그냥 원래 없었던 것처럼 아예 사라졌으면 좋겠다.'
현실이 고달플 때면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을 혼자 찾아간다. 현실세계의 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나 스스로 만듦으로써,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sns에 내가 올리는 사진들을 통해 내 삶의 파편을 보는 사람들 사이에 나는 존재한다. 나에 대한 뒷담화를 하는 사람들의 상호작용 사이에 나는 또 존재한다.
이러한 생각들은 얼핏 '라캉(Jacques Lacan)'의 담론들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은 시간에 속박된 존재다. 하나의 시간에 한 곳에 밖에 존재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틀을 벗어난다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프리카에도, 서울에도, 파주에도 있을 수 있다. 벤이 말한 '동시 존재'라는 것은 이러한 라캉의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나'는 '나의 부재'를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나는 부재한다. 고로 존재한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과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사람은 그저 태어나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사실 산다는 것의 의미 따위는 없고, 그저 '태어남'만으로도 삶의 목적은 다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며 작은 것들부터 사라져 가는 것들의 소중함을, 그 존재의 크기를 가늠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존재를 알아보는 일은 그것이 부재함으로써 드러나게 될 뿐인 탓에, 오늘도 우리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잃어버린 후에야 후회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앞에 나타나는 작은 경고들을 통해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타서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아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