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반복의 대단함에 대해
모처럼 따뜻한 주말 날씨에 운동 겸 이기대(二妓臺) 해안산책로를 찾았다. 해안을 따라 걷는 트레킹으로 유명한 '해파랑길'을 걷는 코스로,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출발하여 이기대 해안산책로를 걷는 '부산 1코스' 중 일부를 따라 걸으며 오랜만에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
오륙도(五六島)는 말 그대로 '대여섯 개의 섬'이라는 뜻으로, 조수간만의 차 혹은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다섯 개로 보이기도 하고 여섯 개로 보이기도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각 섬의 이름은 육지에서 가까운 것부터 방패섬, 솔섬, 수리섬, 송곡섬, 굴섬, 등대섬이며, 등대섬만 유일하게 등대가 있는 유인도(有人島)라고 한다. 오륙도 자체를 유년시절에 와본 후 처음 와본 터라, 오래된 기억과는 달라진 경관이 낯설다. 관광센터와 스카이워크(지금은 폐쇄되어 있다. 코로나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캠핑족들을 위한 공간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나처럼 해파랑길 트레킹을 목적으로 찾아온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오륙도 해맞이공원을 들렀다 가거나, 캠핑을 하기 위해 찾은 사람들도 많아 보였다. 따뜻한 햇볕 사이로 기분 좋은 바다 냄새가 난다. 트레킹 하기에 딱 좋은 기분과 날씨였다.
오륙도를 뒤로 하고 본격적으로 해파랑길 코스를 타고 4.6킬로미터 구간의 이기대 해안산책로를 걷기 시작한다. 이기대(二妓臺)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수영성을 함락시키고 이곳에서 술판을 벌였는데, 기생 두 명이 왜장을 술에 취하게 한 후 끌어안고 절벽 아래 바다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어쩐지 논개 이야기가 생각나는 설화다. 경치가 워낙 좋아 술이 취하는지도 모르고 들어갈 만도 하고, 아찔한 절벽의 높이는 뛰어내리면 쉽게 살아나기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
호국(護國)의 아픔이 있는 산책로를 걷노라면, 생각보다 긴 구간이지만 지루할 틈이 없다. 산등성이를 따라 오르내리는 길과 탁 트인 바다 풍경이 시시각각 변하며 눈을 즐겁게 한다. 봄이 찾아온 듯한 날씨에 다들 숨을 헐떡이고 땀을 흘리며 힘들어하지만, 어쩐지 기분 좋은 힘듦인 것 같은 표정이다. 나 또한 운동으로 땀을 흘리는 것의 기분 좋음을 오랜만에 느낀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터라 나뭇가지들은 말라있고, 꽃을 보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바람에서 은은한 봄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개인적으로 사계 중 봄을 가장 좋아한다. 봄 태생이기도 하거니와 봄날 특유의 공기 냄새와 늦은 오후의 졸리는 햇살, 부유하는 듯한 청춘의 설렘이 느껴지는 계절이다. 오늘의 날씨는 겨울 속의 봄 같아서, 발자국 소리가 내내 가벼웠다.
해안산책로 구간의 반 정도를 지나면 그때부턴 저 멀리 해운대 마린시티와 광안대교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전망데크에서 다음 전망데크로 갈 때마다 가까워지는 광안대교를 보며 사진을 찍는다. 오늘 나의 일일 트레킹 동지인 사람들도 각자의 핸드폰과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는 걸 보니, 역시 부산의 랜드마크는 아무래도 저 녀석인가 싶다.
광안대교가 점점 가까워진다는 것은 오늘의 트레킹도 슬슬 마무리 단계임을 의미한다. 해안산책로의 종착점은 광안대교의 시작점에 가까운 용호만 부두이기 때문이다. 산책로도 이때부터는 데크 바닥이 아닌 비포장 등산로로 바뀌게 되고, 햇살이 비추는 공터에서 나무 사이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풍경도 마주할 수 있다. 3시간가량의 걷기 때문에 조금은 지쳐 있었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예쁜 공간들 덕분에 걸음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마침내 넓은 공터에 다다르면 이제 거의 막바지다. 이기대 어울마당에 도착한 것이다. 미리 준비해 온 간식거리와 음료수를 마시고 잠시 쉬며, 오늘의 산책을 마무리해본다.
해안산책로 시작으로부터 1/3 정도 지점에 농바위와 치마바위 사이 어딘가쯤에 바다를 바로 마주할 수 있는 바위로 내려갈 수 있는 샛길이 나온다. 호기심에 내려간 길 아래에서 마주한 바다는 위에서 본 광경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의 모양과 소리는 매번 달랐다. 매일 똑같아 보이는 나의 일상도 어쩌면 오늘과 내일의 모양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혼자만의 시간에서 에너지를 얻는 유형의 사람이다. 그러나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은 취향이 아닌지라 리프레시가 필요할 때면 어디든 밖으로 나가는 편이다. 트레킹(Trekking)이라는 낱말의 사전적 의미처럼, 좋은 풍광을 바라보며 걸을 때면 뛰어난 예술작품을 볼 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영감을 얻는다. 걷는 것은 끊임없는 반복이지만, 그 반복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의미 없어 보이는 반복일지라도, 그 반복이 바위를 깎는 힘이 되는 것처럼, 나의 일상도 언젠가는 결과를 낼 수 있는 힘을 가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