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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은 Jan 28. 2021

#9 등 떠밀려 ‘강제 성숙’

부모는 그냥 되는 줄 알았다

  고3 때도 하루 8시간은 꼬박 수면을 취해야 하루를 온전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나다. 석사 시절 밤샘이라는 걸 처음 할 때도, 과제가 끝나면 몰아서 수면을 보충했던 나였기에 식욕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건 단연 수면욕이었다. 그런데 아이를 출산하고는 수면욕 따윈 필요충분조건이 아니게 되었다. 아니 필요충분을 누리기엔 삶이 너무 피폐했다는 게 맞는 말일 게다. 밤에 잘 때마다 아이의 뒤척임에 깨어 딥슬립은커녕 늘 악몽에 시달릴 정도로 얕은 잠을 잤었고, 생전 처음 불면증이란 것도 경험했으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잠꾸러기 코알라(고등학교 시절 별명이었다)가 불면증이라니, 이게 말이 된단 말인가. 이렇다 보니 사실 제정신인지 아니면 가수면 상태인지도 헷갈리는 삶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상에 가장 큰 고문이 잠 못 자게 하는 거라던데, 나는 고문을 받고 있는 건가 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옆에서 자는 아이는 발끝으로 내 등을 쑤시거나, 팔을 휘저어 내 눈두덩이를 가격하는 일이 하루 건너 일어나는 일상이다 보니, 아이들과 함께 자는 건 정말이지 매일 밤 운동회를 하는 기분이었다. 한마디로,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에서 아우성을 질러댔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 1호의 이 가는 소리, 2호의 소리 지르는 잠꼬대까지, 밤이면 밤마다 서라운드의 음향이 내 귀를 파고드니 질 좋은 수면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아니 어떨 땐 이렇게 모이기도 쉽지 않은 조합이라 신기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수년을 산 지금 보면 아이의 파고드는 발은 베개로 충분히 커버가 되었고, 오히려 그 발이 귀여워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애정표현까지 하게 되니, 변태가 되어가는 건가 라는 생각마저 든다. 


  같은 성씨의 같은 성별, 같은 혈액형의 남자 셋이 각자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어이없다 생각되다가도 피식거리며 웃기기까지 하니, 이미 나는 이 생활에 젖어가고 있다고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전에는 도저히 용납되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던 일들을 아이들로 인해 ‘수용할만한 것’이 되고 ‘한번 이해해봄직한 것’이 되기도 하면서, 나는 오히려 아이들을 통해 성장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의 간장종지 같은 그릇의 이해심이, 아이들로 인해 점점 커질 수밖에 없게 되었고 더 이상 수용이나 인정 같은 걸 하기 싫어도 자연히 하게 되니, 강제로 성장 촉진제를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등 떠밀려 ‘성숙’이라니, 부모는 이렇게 되어가는 것이란 말인가. 


  ‘담아내기(containment)’라는 개념이 있다. 아이가 극도의 불안을 느껴서 안절부절못하며 부모에게 화풀이를 하고 징징거릴 때, 이를 부모가 알아차려서 “~ 때문에 그러는 거지? 그럴 수 있어.”하며 부모가 먼저 아이의 감정을 담아서 간직하는 것을 말하는 개념이다. 아이가 감정을 처리하지 못하며 당황스러워할 때, 그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이름을 붙여서 아이가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감정의 형태로 되돌려주는 것. 그래서 아이가 두려움 없이 그 감정을 대처하고 조절할 수 있도록 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개념이 오히려 가끔 반대로 다가올 때가 있다. 이전의 나는 도저히 ‘하지 않았던’, 혹은 ‘하기 싫었던’ 것들이었는데, 아이를 통해 이제는 ‘해볼 만한’, 혹은 ‘하게 되는’ 것들로 바뀌게 되는 것이 생기면서. 오히려 나는 아이들로 인해 ‘담아낼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다. 그게 바로 부모가 되어가는 증거라고.  


  그러니 신께서는 아이들을 통해 나로 하여금 등 떠밀어서 강제로 ‘성숙’해 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끄는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다. 물론 이 의심이 나쁘다 할 만한 건 아니다. 이러한 강제가 오히려 웃음 짓게 하니까. 오히려 이러한 강제는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각오마저 생기니, 강제로 성숙되어지는 이 부모라는 길이 녹녹지 않으면서도 해볼 만한 일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남편과 가끔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아이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하고. 남편은 심드렁하게 “뭐, 그런대로 잘 살았겠지, 지금의 삶을 살아보기 전이니까, 근데.... 지금 같지는 않겠지?”하고 말한다. “지금이 어떤데?”라고 되물으면, 남편은 “재밌잖아. 지금은 말 더~럽게 안 듣는 우리 애들도 있고(웃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듯한 표정을 하고선), 근데 우리 애들 좀 예쁘지 않냐?”하며 웃는다. 그 해맑은 웃음은 기꺼이 지금의 피곤한 삶을 받아들일 만큼, 아니 그 이상의 만족과 행복을 주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웃음이기에 나 역시도 함께 웃음 짓게 된다. 아이들이 우리에게 ‘기꺼이 강제 성숙하게 되는 길’로 등 떠밀어도. 남편의 저 해맑은 웃음이 모든 걸 알려주듯 그 길은 기꺼이 가볼만한 길인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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