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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은 Dec 22. 2020

부모, 강제 성숙당하다

아동심리전문가의 양육 고백서

#1 엄마로서 첫 선택을 하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삶은 내겐 매우 익숙한 일이다. 상처 받은 아이들을 만나는 것, 그게 바로 내 일이기 때문이다. 아동심리 전공자로 석사를 졸업하고 운 좋게도 곧바로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났다. 그러던 중 결혼을 했고 오랜 기다림 끝에 첫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엄마 몸이 약하기 때문에 아이를 잃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건강하게 아이를 출산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예정일이 지나, 양수가 터진 채 24시간이 지났음에도 출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아이도 나도 30여 시간의 진통으로 지칠 대로 지쳤고, 둘 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까지 다다랐다. 기대의 찬 마음으로 예약했던 가족분만실에서는 출산을 할 수 없었고, 비교적 젊은 나이의 산모에겐 제왕절개를 지양하던 병원이었으므로, 의료진은 자연분만을 한 번 더 시도하려고 일반 분만실로 옮겼다. 

  물론 그 역시도 실패했다. 결국 수술실로 옮겨서 수술을 하려 했으나, 아이가 중간에 끼어있어서 수술도 할 수 없다고 했단다(실제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후에 남편의 이야기를 통해 이 과정을 알 수 있었다). 급기야 의료진 한 명이 내 배위로 올라와서 배를 누르고, 다른 의료진은 아이를 흡착기로 빼내면서 힘겹게 출산을 하게 되었다(그렇게 출산한 우리집 1호는 한동안 머리에 손오공 마냥 뚜렷한 링 자국을 가진 채 살아야 했고, 외계인 마냥 머리가 울퉁불퉁했었다). 


  사실 난 그때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남편은 연신 내게 뭐라 뭐라 귀에 대고 말했고(아마도 힘을 내라는 말이었을 테다), 난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이 모든 출산 증언은 모두 남편의 기억이다. 내가 죽을 둥 살 둥 할 때 그 모든 기억을 끌어안고 벌벌 떨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버텼던 용감한 우리 남편의 기억. 


  출산 직후, 나와 우리집 1호는 각자 의료진에 의해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거의 이틀에 걸친 사투 끝에, 나와 우리집 1호가 만난 건, 신생아 집중치료실 유리를 사이에 두고였다. 주렁주렁 달고 있는 바늘과 링거들이 작은 몸짓 여기저기에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너무 생경했다. 그것이 1호와 나의 어색했던 첫 만남이었다.


  출산 후 얼른 복직하겠다던 나의 바람은 1호가 건강하다는 안심이 될 때까지 무기한 미루기로 했다. 몸도 마음도 상처 받고 힘겨웠던 아이들을 많이 만났던 나는, 1호를 돌보는 데에 내 모든 전력을 쏟아 붓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엄마로서 한 첫 번째 선택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선택해서 행하는 것. 



  나는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첫 번째 선택을 통해 부모로 한발 더 다가가게 됐다. 그 외의 것은 내 담당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말이다. 남편은 그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그저 기도할 뿐이었어. 당신하고 우리집 1호가 살아만 있게 해 달라고.” 

  맞다. 남편은 아내와 아이 모두 잃어도 병원 측의 책임이 아니라는 등등의 서류에 사인을 했어야만 했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명을 하면서도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심히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그 순간을 견뎠다. 그것이 남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고 부모로서 첫 번째 ‘견딤’‘선택’의 시간이었다. 내가 복직이 아닌, 아이를 24개월까지 두려운 마음으로 양육하며 견디겠다고 결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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